• 21세기 산지기
    • 배해수 / 무형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고고인류학 박사
    •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오후, 평소 가깝게 지내는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간이 되면 함께 벌초를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선뜻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일주일이면 두세 번씩 고향을 오간다. 산에 심어 놓은 고사리밭을 돌보고, 종중 일을 살피고, 선영을 둘러보는 것이 이제는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사람들은 예전처럼 산지기나 종지기, 제지기라는 이름을 거의 쓰지 않는다. 그러나 이름은 사라졌어도 그 역할은 아직 남아있다. 산을 돌보는 산지기이고, 밭을 가꾸는 밭지기이며, 시제를 준비하는 제지기이고, 종중의 살림을 맡는 종지기이기도 하다. 어느새 그 모든 일이 내 몫이 되었다.

      원래는 큰형님이 감당하셔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형님이 먼저 세상을 떠난 뒤 종손 집안의 막내인 내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마다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하나둘 맡은 일이 쌓이다 보니 어느새 여러 이름이 자연스럽게 내 삶이 되었다.

      며칠 전에도 친구 부탁으로 새벽부터 그 집안 벌초를 도와주고 돌아왔다. 그런데 정작 우리 선영은 아직 제대로 손보지 못했다. 산에 심어 놓은 고사리밭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예초기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우거졌다. 농기계 임대사업소에서 승용 풀깎기 기계를 빌려 길과 밭을 정리했지만 선영은 둘레만 겨우 한 바퀴 돌았을 뿐이었다. 늘 가까이 있으면서도 우리 선영부터 먼저 손보지 못했다는 마음이 내내 걸렸다. 그래서 다른 집안 벌초를 선뜻 맡는 일이 더욱 조심스러웠다.

      벌초는 추석을 앞두고 한 번 다녀오면 되는 일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막상 해 보면 그렇지 않다. 예초기를 메고 산을 오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되고, 하루를 꼬박 보내도 끝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은 부모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두 번, 세 번씩 묘소를 찾는다.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작년 여름, 순창의 한 마을회관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다. 이른 아침 마을을 걷다가 동네 할머니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길가에 풀이 허리 높이까지 자란 묘소를 가리키며 투박한 전북 사투리로 말씀하셨다.

      "자식덜이 몇 해째 오덜 않응게 조렇게 묵어부렀제."
      할머니의 안타까워하는 한마디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그 묘소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농촌 곳곳에서 마주하는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해마다 찾아오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삶이 바빠질수록 발걸음은 점점 뜸해진다. 고향은 멀어지고, 묘소도 바쁜 삶의 뒤편으로 조금씩 밀려난다. 그렇게 사람의 발자국보다 풀이 먼저 자라난다.

      요즘에는 벌초 대행업이 자연스러운 벌초 대안이 되었다. 도시에서 시골에 직접 내려오기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현실적인 선택지이고 시대가 만든 새로운 문화이기에 그것을 탓할 이유는 없다. 다만 어떤 서비스도 대신하지 못하는 것은 잠시 묘 앞에 서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조상의 이름을 떠올리는 일이다. 풀은 대신 베어 줄 수 있어도 그 시간만은 대신 이어 줄 수 없다.

      예초기를 잠시 멈추고 선영을 둘러볼 때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 집안 족보를 따라 헤아려 보면 후손은 수천 명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스물여섯 기의 묘소를 돌보는 사람은 수십 년째 작은형님과 나, 단둘뿐이다. 매년 종중회의에서는 현실을 생각해 묘소를 줄이고 표지석으로 남기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언젠가는 한국의 장례 문화도 시대의 흐름에 맞게 달라질 것이다.

      선영을 돌보는 일은 풀을 베고 주변을 정리하는 일에서 끝나지 않는다. 한 집안의 시간을 이어 가는 소중한 일이다. 누군가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아와 이름을 불러 주고, 누군가는 그 자리를 기억해야 오래된 시간도 오늘과 이어질 수 있다.

      예전에는 산지기와 종지기, 제지기라는 이름이 흔했다. 지금은 그 이름도, 그 역할도 점점 오래된 기억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그래도 누군가는 말없이 산을 오르고, 밭을 돌보고, 조상을 위한 제사를 준비하면서 종중의 일을 이어 간다. 그들의 손길이 머무는 곳에서는 한 집안의 역사와 세월이 이어지고, 다음 세대에게 건네질 기억도 함께 살아남는다.

      21세기의 산지기는 오늘도 말없이 시간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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