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연구원이 최근 이슈브리핑을 통해 제안한 ‘전북 백년유산 이음 프로젝트’는 단순한 기념사업이 아니라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그것은 100년의 시간을 전북의 미래 자산으로 전환하자는 전략적 제안이다.
2031년 대한민국 현대 축제의 효시인 남원 춘향제가 100회를 맞고, 2033년 ‘서해안의 진주’ 변산해수욕장이 개장 100주년을 맞는다. 이는 우연한 연대기의 나열이 아니라, 전북이 ‘시간의 수도’로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 분기점이다.
100년은 한 세대를 넘어 네 세대를 잇는 시간이다. 개인의 기억(Memory)이 사회가 합의한 역사(History)로 굳어지는 상징적 경계이기도 하다. 1931년 권번 기생들의 자발적 기획으로 시작해 전쟁 중에도 멈추지 않았던 춘향제의 서사는 공동체의 끈질긴 생명력을 증명한다.
1933년 문을 연 변산해수욕장은 바다를 ‘생업의 공간’에서 ‘휴양의 공간’으로 인식 전환시킨 근대적 여가문화의 출발점이었다. 이처럼 백년유산은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니라, 지역 정체성을 형성한 문명사적 이정표다.
전북연구원이 제시한 산업·경제, 생활·건축, 교육·종교, 문화·기억 분야의 100년 유산 목록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섬진강댐과 만경대교, 임피역과 해망굴, 전주여고와 원불교 익산 성지, 군산의 제빵 문화와 전주 행원에 이르기까지, 2026년부터 2035년 사이 전북은 ‘백년의 황금기’를 맞는다. 이 자산을 흩어진 점이 아닌 선과 면으로 연결할 때 비로소 ‘시간여행 벨트’라는 공간 전략이 완성된다.
국내외 사례는 이를 뒷받침한다. 독일 루르 지역은 폐산업 시설을 문화예술 플랫폼으로 재생해 산업유산을 관광 자산으로 바꾸었다. 일본 가나자와는 100년이 넘은 상점과 장인 문화를 ‘노포(老舗) 브랜드’로 체계화해 도시 품격을 끌어올렸다.
서울 역시 근대 건축물 재생을 통해 원도심의 경제를 되살렸다. 이들의 공통점은 ‘보존’에 머무르지 않고 ‘재해석’을 통해 시장과 연결했다는 점이다. 기억을 자본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전북도 마찬가지다. ‘JB-100 인증제’와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은 기억의 자산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백년의 살롱, 춘향제 리브랜딩, 다크투어리즘의 예술화는 가치의 재창조 전략이다. 여기에 청년 로컬 크리에이터가 결합해야 한다.
100년 전 레시피를 복원한 ‘백년 빵집’, 근대 사진기술을 재현한 ‘백년 사진관’, 일본식 가옥과 한옥을 활용한 복합문화공간은 충분히 경쟁력 있는 콘텐츠다. 행정이 공간을 열고, 청년이 콘텐츠를 채우는 구조가 만들어질 때 백년유산은 ‘힙한 경제’로 진화한다.
백년유산을 단지 ‘관광 상품’으로만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지역 공동체의 자존감과도 직결된 문제다. 100년을 이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곧 신뢰의 증표이며, 세대 간 약속의 결과다. 이를 교육 자원으로 활용한다면 효과는 더욱 크다.
초·중·고 교과 과정과 연계한 ‘우리 고장 백년유산 탐방 프로그램’을 정례화하고, 대학과 연구기관이 참여하는 구술사(口述史) 프로젝트를 병행한다면 청소년들은 지역을 떠나야 할 공간이 아닌, 이해하고 계승해야 할 터전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기억의 전승이 곧 인재의 정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셈이다.
백년유산은 탄소중립과 도시재생이라는 시대 과제와도 맞닿아 있다. 기존 건축물과 기반시설을 보존·활용하는 것은 새로운 건설보다 환경 부담이 적고, 원도심 상권을 회복시키는 촉매가 된다. 근대역과 옛 양곡창고, 일본식 가옥을 리모델링해 창업 인큐베이팅 공간이나 문화예술 레지던시로 전환한다면 과거의 흔적은 미래 산업의 실험실이 된다. 이는 단순한 미화 작업이 아니라 공간의 서사를 입힌 고부가가치 전략이다.
특히 2030년대에 집중될 100주년 이벤트는 ‘전북 방문의 해’와 연계한 대규모 캠페인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1회성 축하 행사가 아니라 10년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로 설계해, 해마다 다른 주제를 부여하고 스토리텔링을 축적해야 한다. 예컨대 2031년은 ‘축제의 100년’, 2033년은 ‘바다와 휴양의 100년’이라는 식으로 연속성을 부여하면 국내외 관광객에게도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북도 차원의 통합 추진이다. 개별 시·군의 기념행사로 흩어지면 상징성은 약화된다. 2030년대에 집중된 100주년 이슈를 하나의 거대한 시간 축으로 묶어야 한다. ‘사유에서 공유로, 기억에서 자본으로’라는 비전 아래, 전북 백년유산 조례 제정과 전수조사, 민관 거버넌스 구축이 병행돼야 한다.
전북은 늘 새로운 성장동력을 외부에서 찾으려 했다. 그러나 어쩌면 답은 이미 우리 곁에 있다. 100년을 버텨온 공간과 사람, 이야기 속에 축적된 신뢰와 정통성은 어떤 인위적 브랜드보다 강력하다. 백년유산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미래를 여는 자본이다.
이제 전북은 시간을 소비하는 지역이 아니라 시간을 경영하는 지역으로 전환해야 한다. 100년의 기억을 든든한 곳간에 쌓아두는 데 그치지 말고 꺼내어 투자하고 순환시키는 공공의 성장 자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결국 관건은 속도와 의지다. 백년유산은 시간이 만들어주지만, 그것을 자산으로 전환하는 일은 지금 세대의 결단에 달려 있다. 그때 전북은 대한민국 근대 문화의 성지이자, 지속가능한 지역발전 모델의 선도 사례로 우뚝 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