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지나고 가을빛이 깊어 가던 어느 날이었다. 선산의 종중 묘역을 지나는데 멀찍이 떨어진 산기슭에서 예초기를 조립하는 젊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곁에는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 한 분이 앉아 있었다. 주변의 묘소들은 이미 벌초를 마친 뒤였지만, 그들이 찾아온 봉분은 무성한 풀과 잡목에 덮여 있었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봉분도 많이 내려앉아 있었다.
추석도 지났는데 이제야 벌초를 하러 왔느냐고 물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곳은 할머니의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묘소였다. 아들 없이 외동딸만 두었던 집안으로 세월이 흐르면서 묘소를 돌볼 사람도 마땅치 않았던 모양이다. 예초기를 준비하던 젊은이는 할머니의 손자였다. 손자에게는 먼 외가의 조상이지만, 할머니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아버지의 묘소였다.
할머니는 이제 몸을 움직이는 일조차 쉽지 않은 형편이었다. 더 늦기 전에 아버지 산소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부탁에 손자가 함께 길을 나섰다고 했다. 명절 전에 벌초를 마쳐야 한다는 오랜 관습도 그날만큼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에게는 살아생전 아버지가 잠든 자리를 다시 찾아보는 일이 더 간절했을 테니까.
풀숲에 묻혀 있던 봉분 앞에서 예초기를 준비하는 손자와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할머니를 보며 여러 생각이 스쳐 갔다. 같은 봉분을 바라보면서도 두 사람에게 그곳은 서로 다른 세월과 기억이 머무는 자리였다.
요즘은 부모의 묘소조차 직접 벌초하기 어려워 전문업체에 맡기는 일이 흔해졌다. 자손들이 먼 도시에 흩어져 살고, 일상에서 시간을 내어 산소를 찾는 일도 쉽지 않다. 한때 집안의 중요한 연례행사였던 벌초가 이제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되고 있다. 그런 현실을 두고 효성이 부족해졌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묘소를 찾아오는 발길이 뜸해지는 데에는 여러 사정이 있다. 세대가 바뀌면서 조상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후손들도 생겨난다. 자손이 없는 묘소는 세월이 흐를수록 풀숲에 묻히고, 누군가 기억해 주기를 기다리는 자리로 남는다. 살아 있는 이와 고인이 된 이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은 어쩌면 피하기 어려운 시대의 변화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고인을 모시는 방식도 조금씩 달라질 필요가 있겠다. 봉분을 세우고 해마다 벌초하는 풍습이 앞으로 얼마나 오래 이어질 수 있을지 생각해 볼 일이다. 자연장이나 작은 표지석으로 고인을 기억하는 방식이 더 널리 자리 잡고, 이미 조성된 묘소를 정비하려는 가족들의 부담도 덜어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장묘문화의 변화에 맞춰 관련 제도와 행정적 지원도 세심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묘소가 후손에게 무거운 의무로만 남지 않았으면 한다. 풀을 베고 봉분을 다듬는 수고에 지쳐 고인을 떠올릴 겨를조차 없다면 그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언제든 마음이 내킬 때 찾아와 잠시 머물며 지나간 시간을 돌아볼 수 있는 곳, 그리운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 부담스럽지 않은 곳이 되었으면 한다.
생각해 보면 봉분을 높이 쌓고 풀 한 포기 없이 말끔하게 벌초했다고 해서 고인을 향한 마음까지 깊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묘소를 돌보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마음까지 세월과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날 산기슭에서 만난 할머니는 아버지를 만나러 왔고, 손자는 할머니를 모시고 왔다. 오래 묵은 풀을 베어내는 동안, 서로 다른 세대의 두 사람이 한 봉분 앞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