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적 합의 정치, 어렵지만 꼭 가야 할 길
    • 김관춘 / 논설위원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의료 대란의 복잡한 난맥상을 풀어가기 위해 ‘사회적 합의’를 통해 해법을 찾겠다고 선언했다. 공공의대 설립과 공공의료 강화라는 구체적 비전도 제시했다. 그 의도는 옳고, 방향 또한 분명하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라는 말이 가진 무게를 생각하면,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새정부 출범을 앞둔 지금 이 시점에 우리 사회에서 가장 어렵고 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사회적 합의’가 아닐까.

      사회적 합의란 단순히 다수결로 갈라 승패를 나누는 것이 아니다.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다양한 집단이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서로의 입장을 경청하고 끈질긴 대화와 설득을 통해 공동체 전체에 유익한 방향을 찾아내는 일이다. 정치란 본디 이런 ‘합의의 기술’이어야 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 우리 사회는 이에 익숙하지 않았다.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 군사 독재를 거쳐 민주화 이후에도 우리는 강자의 뜻에 약자가 순응하는 구조에 익숙해 있었다. 강자들은 합의가 아닌 힘으로 문제를 해결했고 약자들은 침묵하거나 저항하다 짓밟혔다.

      이런 관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특히 의료, 부동산, 노동, 기후위기, 저출산 등 국가적 난제를 해결해야 하는 오늘날, 이해관계는 더욱 복잡해졌고 사회적 신뢰는 더욱 약해졌다. 이런 환경에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낸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의료계만 해도 그렇다. 국민들은 흔히 ‘의료계’라는 단일 집단을 상정하지만 실제 의사집단 내부에는 깊은 이해 충돌이 존재한다. 대형병원을 운영하는 병원장, 중소병원협회 소속 병원들, 전공의, 의대생, 필수과 전문의, 비급여 중심의 비필수과 의사들 모두 입장이 제각각이다.

      예컨대 의대 정원 확대 문제를 보자.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은 공급 과잉으로 인한 직업 가치 하락을 우려해 반대하지만 중소병원들은 인력난 해소를 기대하며 환영한다. 서울대병원장도 과거 의대 증원 정책에 찬성했다. 또한 필수과(응급의학과, 소아과, 산부인과 등) 의사들은 보험급여 수가에만 의존하는 구조 탓에 수익이 낮고, 비급여 진료 중심의 성형외과, 피부과, 안과 등은 높은 수익을 올리면서 의료계 내부의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의사들은 모두 고소득자’라는 통념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

      이처럼 내부적으로 갈라진 의료계와의 합의를 이루려면 단순히 대한의사협회와만 협상하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 중소병원협회, 병원협회, 전공의협의회, 의대교수 협의회 등 다양한 조직과 개별 이해관계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 단일한 주체와 협상하는 것보다 몇 배는 복잡한 과정이다. 그러나 이 과정을 생략하고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합의는커녕 더 큰 반발과 사회적 갈등만 낳게 된다. 이런 점에서 윤석열 정부 시기의 의료 정책 접근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비단 의료만의 문제가 아니다. 부동산 문제를 보자. 한때 정부는 집값 안정을 위해 다주택자 규제를 강화했지만 동시에 청년·무주택자의 주거 안정을 위해 공급 확대도 요구받았다. 여기에 기존 주택 소유자들과 신규 수요자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충돌한다. 부동산 세제나 공급 정책 하나를 결정할 때마다 이익과 불이익이 갈리고 사회는 심각하게 양분된다. 이 과정에서도 사회적 합의는 필수적이다. 다만, 이 역시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대변해서는 성립할 수 없다.

      또한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는 더 심각하다. 보육, 교육, 일자리, 주거, 노동환경 등 모든 정책이 긴밀히 연결돼 있고 세대 간 이해관계가 엇갈린다. 청년층은 결혼과 출산을 주저하고 고령층은 복지 확대를 요구한다. 어느 한 세대만을 위해 정책을 짜는 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모든 세대, 모든 집단이 함께 설득되고 동참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기후 위기도 마찬가지다. 탄소중립 목표를 세운다고 해서 모두가 쉽게 따라올 수 없다. 기업들은 생산비 증가를 우려하고 노동자들은 일자리 불안을 걱정한다. 시민들은 에너지 비용 상승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친환경 에너지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정부의 설득, 지원, 조정이 필수적이다.

      사회적 합의는 쾌도난마가 아니라 느리면서 고통스럽다. 때론 실패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을 생략하고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면 그 대가는 더욱 크다. 사법은 옳고 그름을 가르고 승패를 결정한다. 하지만 정치는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이해와 입장을 조율, 공동체 전체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정치’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 정치는 권력을 휘두르는 일이 아니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집단 간의 조정과 중재의 기술이다. 그리고 갈등은 피할 수가 없고,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의 본령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력한 지도자가 아니라 더 성숙한 시민과 더 섬세한 조정자로서의 정치인이다. 의료, 부동산, 기후위기, 연금개혁 등 모든 분야에서 사회적 합의를 이뤄내는 일은 정말 어렵다. 하지만 그것만이 공동체가 함께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어서 포기할 수도 없다. 사회적 합의의 정치, 그 험난한 길을 우리 모두 함께 걸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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