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위원장이 이번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면 6년 8개월 만에 다시 중국을 찾는 게 된다. 이 자리에서 시진핑 주석,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북·중 및 북·러 정상회담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 다만, 북·중·러 3자 정상회담은 중국 측이 난색을 표명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김정은 위원장의 이번 방중 목적은 당장 한미일 남방삼각에 맞설 북중러 북방삼각을 구축하지는 못하더라도, 북·러 관계 강화를 통해 안보는 러시아로부터 보장받고 북·중 관계 증진을 통해 경제적 이익은 중국에게서 얻는다는 ‘안러경중(安露經中)’의 전략구상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중국정부는 지난 7월 1일 제80주년 전승절 행사에 이재명 대통령을 초청했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이재명 대통령이 참석하는 대신에 우원식 국회의장이 참석하기로 하고, 이에 앞서 박병석 전 국회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대통령 특사단을 중국에 보냈다. 신정부의 한중관계 개선 의지에도 불구하고 이재명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기로 한 것은 2015년 제70주년 전승절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하면서 많은 외교적 부작용이 나타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석은 ‘균형외교’를 통해 한·중 관계를 강화하고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에 공동 대응하는 성격이 강했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중국의 협력을 얻고 한중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실용외교라는 긍정적 평가도 있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전승절 참석에 대해 한국이 미·일 동맹에서 벗어나 중국에 기울어지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박 대통령이 서방국가 정상 중 유일하게 참석한 점이 논란을 키웠다. 중국의 전승절이 단순한 외교적 행사를 넘어 동아시아 안보구도와 한미 동맹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중국전승절의 명칭은 ‘중국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전쟁 승리 기념일’이다. 명칭에서 보듯이 전승절 행사의 목적은 ‘반일 반서방 국제연대’에 있다. 또한 중국공산당 정부가 전승절 행사를 대대적으로 거행함으로써 항일전쟁의 주체가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아닌 공산당 정부에 있다는 ‘역사수정주의’를 노린 것이다. 이는 중국 주도의 대만 통일을 정당화하는 목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
박근혜의 중국전승절 열병식 참석은 결과적으로 한·일 및 한·미 관계에서 우리나라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다. 역대 정부가 원칙을 지켜왔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졸속으로 처리하고 햇볕정책의 성과로 만들어진 개성공단이 문을 닫게 되었다. 또한 주한미군에 대한 사드 배치 허용으로 이어지면서 중국정부가 한한령(限韓令)을 발동하는 구실을 제공했다. 박근혜 정부의 근시안적인 대중 우호 정책이 역설적으로 한·중 관계를 악화시킨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8월 24일 한중 수교 기념일에 맞춰 박병석 전 국회의장을 단장으로 한 대통령 특사단을 중국에 파견했다. 이날이 이 대통령의 방일, 방미 기간과 겹쳤기 때문인지, 시진핑 주석을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해 ‘홀대’ 논란이 불거졌다. 과거 대통령 특사들이 중국에 갔을 때 시 주석을 만나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특사단이 시 주석은 못 만났지만, 중국 측은 자오러지 전인대 상무위원장과 왕이 외교부장, 왕원타오 상무부장 등이 나와 나름대로 특사단을 예우하는 모양새는 취했다. 이번 전승절 열병식을 관람할 천안문 망루에서 우원식 국회의장을 어떻게 예우할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대중 특사단은 10월 말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시 주석의 참석을 공식 요청하는 이 대통령의 친서를 왕이 외교부장에게 전달했다. 지난 8월 31일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의 10월 말 경주 APEC 정상회의 참석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중국은 시진핑의 APE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한 선결조건으로 ‘이재명 대통령의 중국전승절’ 참석을 내걸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실제 시진핑이 경주에 올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만약 시진핑 주석이 APEC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바로 신냉전 구도의 형성을 의미하진 않더라도, 여전히 한·중 관계 개선은 이재명 정부가 내건 ‘국익중심의 실용외교’에 숙제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시진핑 주석이 APEC 참석을 위해 한국에 와 한·중 정상회담을 개최하게 된다면, 김정은 위원장의 방중에 따른 우려에도 불구하고 향후 한·중 관계는 크게 개선될 여지가 크다. 김 위원장이 그린 ‘한·미·일 vs. 북·중·러’의 신냉전 구도가 형성될 여지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로선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시진핑 주석이 참석할 뿐만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 이시바 일본 총리도 APEC에 참석해 다자 정상회의뿐만 아니라 한·중은 물론 미·중, 중·일 양자 정상회담도 성사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적어도 한반도를 둘러싼 신냉전구도 형성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고, 미국, 일본에 이어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더 나아가 북한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경주 APEC의 성공적 개최 여부는 이재명표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의 성패를 가르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 * *
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외부원고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