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은 이재명 정권에게 외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재명 정권의 집권 기간 내내 관통할 대외정책의 큰 방향과 구도가 이 시기에 정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달 말 열리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아펙·APEC) 정상회의에,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이 동시에 참석합니다. 정치·외교·군사·경제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패권 경쟁을 하는 미·중 두 나라 정상이, 트럼프 2기 정권 이후 처음 대면하는 역사적인 무대입니다.
이때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를 예약한 '여자 아베' 다카이치 사나에도 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 기회를 이용해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재명 정권으로서는 주최국의 이점을 살려 한국이 가지고 있는 외교적 숙제를 한꺼번에 풀 수 있는 호기입니다.
한 나라가 아무리 좋은 외교 정책을 세워도 대외관계는 상대가 있기 때문에 혼자의 힘으로는 달성할 수 없습니다. 상대가 호응하거나 호응하도록 설득하지 못하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그래서 10월 경주 아펙 정상회의를 전후해서 펼쳐지는 외교 무대가 이재명 정권으로선 매우 중요합니다. 이재명 정권의 외교 정책은 '국익 중심 실용 외교'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정권도 외교를 하면서 국익을 중시하지 않는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국익 중심'이란 용어는 공허한 수사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실용 외교만 남는데,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라는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을 생각하면 그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임 윤석열 정권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진영과 이념을 앞세운 맹목 외교를 하는 바람에 국익을 해쳤다는 반성에서 나온 정책입니다. 그래서인지 나라 안팎에서 반응이 좋습니다. 그래도 '무엇을 위한 실용인가?' 하는 점은 여전히 남습니다. 저는 한반도를 포함한 세계의 '평화와 번영'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의 평화 없이 한반도 평화가 없고, 세계의 번영 없이 한국의 번영도 없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을 둘러싼 외교 환경이 녹록하지 않습니다. 고사성어를 빌려 표현하면, '사면초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방에 난관이 널려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나타난 난관은 일본입니다. 일본 안팎의 예상을 깨고 아베 신조 전 총리보다 더욱 극우적인 다카이치가, 4일 실시된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총재로 당선됐습니다. 그는 각료 시절에도 매년 에이(A)급 전범을 합사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배외주의자입니다. 심지어 한국과 중국이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비판하는 것을 두고 "도중에 참배를 그만두는 등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니까 상대가 기어오르는 것"이라는 폭언을 한 바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부정하고 독도 영유권을 강하게 주장하는 ’반한 극우 전사'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집권 이후 자유주의 성향의 이시바 시게루 총리와 100여 일 동안 3차례의 정상회담을 하면서 쌓아온 대일 실용 외교의 토대가 다카이치의 출현으로 여차하면 일거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물론 총리가 되기 전과 총리가 된 뒤는 정책이 달라질 수 있고 트럼프 대통령의 경제 압박이라는 공통의 과제가 있기에 총재 당선 전처럼 마구 달리지는 않겠지만 이 대통령이 최악의 일본 상대를 만난 건 분명합니다.
일본보다 더한 위협은 미국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3500억 달러(한화, 492조 8700억 원)를 자기 주머니에 든 돈으로 간주한 채, 관세 협박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주한미군을 지렛대로 국방비와 주한미군 주둔비 대폭 증액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라도 미국의 요구대로 한다면, 나라가 거덜 날 내용들입니다. 윤석열 정권이 해온 한미동맹 중시, 미국 추수 일변도 외교를 그대로 이어간다면 어떤 재앙이 초래됐을지 끔찍하기만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대통령은 이면 합의를 안 하고, 국익에 반하는 합의는 안 하며, 공정하고 합리적이 아니면 안 한다는 '3불 정책'을 천명하며 버티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자와 얼룩말의 싸움에서, 한 사람의 지도자 힘으론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얼룩말 무리 전체가 힘을 합쳐 힘찬 발길질을 해야 겨우 사자의 횡포를 막아낼 수 있습니다. 마침, 미국 조지아주에 공장 건설을 해주러 간 한국 파견 노동자 300여 명을 노예처럼 쇠사슬로 묶어 질질 끌고 가는 미국의 야만 행위를 목격한 시민들이 깨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추석 연휴 기간에 만난 시골 촌로들마저 "미국이 우리나라를 마소 취급한다"라고 분개하는 지경입니다.
저는 이런 시민의 각성을, '생활 반미'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이제까지 광주 학살에 군 동원 용인, 효순·미선 양 압사 사건, 윤금이 씨 살해 사건을 계기로 터진 반미 움직임이 좁은 범위에서 강렬하게 분출한 일과성 '정치 반미'였다면, 조지아 사태로 인한 반미는 넓은 범위에서 은근하게 지속되는 '생활 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활짝 타오르다 금세 꺼지는 불꽃보다 은근하게 오래 타는 숯불이 무서운 법입니다. 이재명 정부는 정치 반미에서 생활 반미로 변하는 한국의 민심을 활용해 트럼프 발 폭풍을 헤쳐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계속>
* * *
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외부원고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