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세대가 저물어 가는 풍경
    • 배해수 / 무형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고고인류학 박사
    • 아파트 분리수거장을 지나다 문득 걸음을 멈춘 적이 있다. 구석 한편에 버려진 자개농 하나가 서 있었다.
      참 낯선 풍경이었다. 은빛 자개무늬는 여전히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는데, 자개농이 놓인 곳은 그 빛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쓰레기 분리수거장이었다. 한때 집 안에서 가장 귀한 대접을 받았던 가구가 가장 외진 자리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머리로는 자연스러운 변화임을 알면서도 마음은 그 풍경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일주일이면 두세 번 시골을 오간다. 생활의 근거지는 전주에 있지만 문중 땅을 임대해 농사를 짓고 있어 도시와 시골을 오가는 일이 어느새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 길에서 오래도록 익숙했던 풍경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모습을 자주 만난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등교하던 중학교는 오래전에 문을 닫았고, 아직 남아 있는 초등학교에서도 가방을 메고 오가는 아이들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대신 차고지에 들어선 노란 통학버스만 눈에 띈다. 가끔 찾아뵙던 친척 어르신들도 해가 바뀔 때마다 한 분, 두 분 자취를 감춘다.
      도시 외곽도 크게 다르지 않다. 버스 종점 쉼터에서 장기와 바둑을 두며 담소를 나누던 얼굴들도 해마다 조금씩 바뀐다. 누군가는 떠나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빈자리에 앉는다. 세월은 그렇게 소리 없이 사람과 풍경을 바꾸어 놓는다.

      자개농도 오랜 세월을 견디며 여기까지 왔으리라. 한 시절 분명 자개농은 집안에서 가장 귀한 살림이었다. 안방 한쪽을 넓게 차지하며 살림의 중심이 되었고, 집안 형편을 보여 주는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딸을 시집보내는 부모에게는 각별한 혼수품이었다. 혹여 시집살이에 기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형편이 어려워도 빚을 내어 자개농을 마련해 주곤 했다. 그 안에는 옷과 이불만이 아니라 부모의 바람과 애틋한 사랑도 함께 담겨 있었다.

      그래서 자개농은 오랫동안 귀한 대접을 받았다. 이사를 여러 번 다녀도 다른 가구는 바꾸면서 자개농만은 끝내 싣고 다녔다. 손때가 묻고 모서리가 닳아도 쉬이 버리지 못했다. 부모가 어렵게 마련해 준 혼수품이었고, 그 마음을 항상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이 담긴 생필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자개농이 이제는 분리수거장 한편에 낯선 모습으로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 곁에는 오래 쓰던 침대도 함께 나와 있다. 문득 저 침대를 쓰던 사람은 지금 어디에서 잠을 청하고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요양병원으로 옮겨 갔을 수도 있고, 이미 가족들의 기억 속으로 떠났을 수도 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그가 평생 곁에 두었던 물건들만 조용히 남아있다.

      세상이 달라지면서 붙박이장이 자개농을 대신했고 생활은 훨씬 편리해졌다. 자개농은 무겁고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오래된 가구가 되었다. 그러한 변화를 이해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은 세상이 바뀌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때가 있다. 여전히 은빛으로 반짝이는 자개농과 그것이 놓인 쓸쓸한 풍경이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까닭이다.

      버려지는 것은 낡은 가구 하나만이 아니다.

      그 자개농에는 한 사람이 살아낸 시간들이 켜켜이 스며 있다. 자식들의 옷을 넣고, 명절이면 새 이불을 꺼내고, 손주가 태어나면 작은 배냇저고리를 곱게 접어 넣었을 것이다. 기쁜 날도 있었고, 눈물 나는 날도 있었을 것이다. 자개농은 아무 말 없이 한 집안의 수많은 계절을 품어 왔다.

      분리수거장 앞을 지날 때마다 걸음을 조금 늦추게 된다. 누군가에게는 처분해야 할 오래된 가구일 뿐이지만, 내게는 한 사람이 치열하게 살아낸 생애가 오롯이 담긴 풍경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물에도 생애가 있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머물렀던 사물은 물건으로만 남지 않는다. 그 사람의 시간과 기억을 함께 품는다. 주인이 떠난 뒤에도 말없이 그 삶을 증언하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나는 버려진 자개농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한때 가장 화려했던 것이 가장 쓸쓸한 자리에서 조용히 퇴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자개농과 함께 한 시대를 살아낸 이름 모를 삶에 마음 깊이 경의를 표한다.

      한 세대가 저물어 가는 풍경 앞에서는 누구라도 발걸음을 떼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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