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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 됴코 여름 하나니'가 ‘군주민수(君舟民水)’로 얼룩진 병신년



'백성은 물이요 임금은 배이니, 강물은 배를 띄우지만, 강물이 화나면 배를 뒤집을 수 있다.'


지난 2001년부터 '교수신문'은 해마다 연말이면 한 해 동안 우리사회를 관통하는 사자성어를 발표해 오고 있다. 지난해 사자성어로 순자(荀子)의 '왕제(王制)' 편에 나오는 ‘군주민수(君舟民水)’를 선정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성난 민심이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며 매주 광장에 모여 하야를 외친 끝에 대통령 탄핵소추까지 이끌어낸 상황을 빗댄 것이다. 사자성어 2위는 '역천자망(逆天者亡)'이다. '천리를 거스르는 자는 패망한다'는 뜻이다.


그해 선택된 사자성어는 우리사회를 조망할 수 있는 촌철살인이자, 민심 '풍향계'이기도 하다. 2005년까지는 연말 사자성어만 발표하다가 2006년부터는 연초 ‘희망의 사자성어’도 함께 내놓고 있다.


연말 사자성어는 매번 어둡고 우울한 내용으로 장식됐다. 암울한 국내 정치상황과 맞물려 있는 탓이다. 연말 사자성어로는 2001년 오리무중 (五里霧中), 이합집산(離合集散·2002), 우왕좌왕(右往左往·2003), 당동벌이(黨同伐異·잘잘못에 관계없이 같은 무리끼리 뭉치고 다른 무리는 공격함·2004), 상화하택(上火下澤·서로 이반하고 분열함·2005)등이었다.


새해를 맞이하는 연초 사자성어는 항상 기대와 희망이 담겨있다. 하지만 세밑이 되면 예외 없이 실망과 구김살로 점철됐다.

◆박근혜 정부 들어 비판 강도 한층 높아져

2006년 새해 사자성어는 '해나가면 순조롭게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이 담긴 약팽소선(若烹小鮮)이었으나, 마무리는 ‘구름은 끼었으나 비가 오지 않음’이라는 뜻의 불운이 깔린 ‘밀운불우(密雲不雨)'로 매듭됐다.


그 다음도 연이어 똑같은 모습이 반복됐다. 반구제기(反求諸己·화살이 적중하지 않더라도 자기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함·2007)→자기기인(自欺欺人·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임), 광풍제월(光風霽月·뜻 맑은 날의 바람과 비 갠 날의 달. 훌륭한 인품을 비유함·2008)→호질기의(護疾忌醫·병을 숨겨 의원에게 보이기를 꺼림), 화이부동(和而不同ㆍ화합하지만 부화뇌동하지는 않음·2009)→방기곡경(旁岐曲逕·샛길과 굽은 길), 강구연월(康衢煙月·태평한 시대의 평화로운 풍경·2010)→장두노미(藏頭露尾·머리는 감췄으나 꼬리가 드러남), 민귀군경(民貴君輕·'백성은 귀하고 임금은 가볍다·2011)→엄이도종(掩耳盜鐘·귀를 막고 종을 훔침), 파사현정(破邪顯正·그릇된 것을 깨뜨리고 바른 것을 드러냄·2012)→거세개탁(擧世皆濁·세상이 온통 혼탁함)으로 바람과 달리 모두 역주행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인 2013년 1월 교수들은 새해의 사자성어로 '제구포신(除舊布新)'을 택했다. 제구포신은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펼치라는 의미다.


'제구포신'이란 덕담을 건넸던 교수신문은 같은 해 연말, 한 해를 대변하는 사자성어로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는 '도행역시(倒行逆施)'를 꼽았다. 교수신문의 사자성어는 해가 거듭될수록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2014년에는 전미개오(轉迷開悟·어지러운 번뇌에서 벗어나 열반의 깨달음에 이름·2014)→지록위마(指鹿爲馬·위아래 사람들을 농락해 권세를 휘두르는 것), 정본청원(正本淸源·근본을 바르게 하고 근원을 맑게 함·2015)→혼용무도(昏庸無道·암흑에 뒤덮인 것처럼 어지러움)로 마무리됐다.

◆사상 최악의 취업난, ‘아무리 구해도 얻지 못한다’

올 초에는 용비어천가의 한 구절로 우리말인 '곶 됴코 여름 하나니'가 선정됐으나 군주민수(君舟民水·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로 되돌아왔다.


정치권의 혼란은 경제계 전반까지 무거운 분위기의 사자성어가 몰아치게 했다. 국내 기업 및 가계 환경은 장기 내수침체에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말미암아 그 어느 때보다 어렵다. 중소기업인들은 올해 경영환경의 키워드로 파부침주(破釜沈舟)를 뽑았다. '밥 지을 솥을 깨뜨리고 돌아갈 때 타고 갈 배를 가라앉힌다'는 의미로 절박한 상황인식이 배어있다.


사상 최악의 취업난, 그리고 직장인들에게는 고단함과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고민. 구직자와 직장인들이 생각하는 지난해 사자성어는 무엇일까. 취업포털 ‘사람인’이 구직자와 직장인 1259명을 대상으로 한 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를 조사한 결과, 구직자는 ‘아무리 구해도 얻지 못한다’는 뜻의 ‘구지부득’(17%)을 꼽았다. 최악의 구직난에 최종 합격은커녕 서류부터 번번이 ‘광탈’하는 어려운 현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직장인들은 ‘먹고 사는 데 대해 걱정한다’는 ‘구복지루’(14.1%)를 첫 번째로 꼽았다. ‘월급 빼고 다 오른다’는 자조 섞인 농담처럼 박봉에 치솟는 물가를 견뎌야 하는 팍팍한 현실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촛불민심 등에 업고 대선주자들 대권의지 표출

각 당의 대선주자들도 2017년 '새해 사자성어'를 뽑으며 내년 대권 의지를 드러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안 가결로 조기 대선 가능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대선주자들은 촛불민심을 사자성어에 담았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날 새해 사자성어로 '나라를 다시 만들다'는 뜻의 '재조산하(再造山河)'를 뽑았다. 문 전 대표는 "임진왜란 당시 실의에 빠져있던 서애 류성룡에게 충무공 이순신이 적어 준 글귀"라며 "폐허가 된 나라를 다시 만들지 않으면 죽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던 충신들의 마음이라고 설명했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바르지 못한 것은 바른 것을 범치 못한다"며 '사불범정(邪不犯正)'을 제시했다. 이 시장은 "2017년에는 위대하고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드는 평화적 혁명, 즉 건국 명예혁명을 반드시 성공시킬 것"이라며 "공정하고 공평한 민주공화국이 우리가 꿈꾸는 나라 모습"이라고 말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전 상임공동대표는 마부위침(磨斧爲針)을 꼽았다.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말로, 아무리 이루기 힘든 일도 끊임없는 노력과 끈기 있는 인내로 성공하고야 만다는 뜻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솥을 새것으로 바꾸듯 혁신한다'는 뜻인 '혁고정신(革故鼎新)'을 내세웠다. 박 시장은 "2017년은 탄핵의 완성과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의 해"라며 "기득권 체제를 청산하고 99대1 의 불평등 구조를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민주주의(民主主義)'를 선정했다. 안 지사는 "지난해 국민들은 촛불 광장에서 '이 나라의 주인은 바로 국민'이라고 선언했다"며 "국민의 명령은 낡은 20세기를 끝내고 시대교체를 이루라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김부겸 의원은 '이슬이 모여 바다를 이룬다는 뜻'의 '노적성해(露積成海)'를 내세웠다. 김 의원은 "작은 촛불이 모여 큰 민주주의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 떠오른 사자성어"라며 "개인적으로는 뚜벅뚜벅 걸어서 보다 큰 국민의 마음을 얻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개혁보수신당(가칭) 창당 주역인 유승민 의원은 '낡은 것을 깨뜨려야 새 것을 세울 수 있다'는 '불파불립(不破不立)'을 선정했다. 유 의원은 "새해에는 개혁보수의 가치를 바로 세우고, 정의로운 대한민국, 따뜻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개혁보수신당에 합류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거문고의 줄을 바꾸어 맨다는 뜻'인 '해현경장(解弦更張)'을 내세웠다. 오 전 시장은 "옛것을 새롭게 개혁하자는 뜻"이라며 "다 함께 어려울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사자성어 대신에 '코리아 리빌딩(한국 재건)'을 화두로 던졌다. 남 지사는 "2017년은 낡은 체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원년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최필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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