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원평지역에는 4일과 9일의 5일장이 지금도 열리고 있다, 100년전 3월 19일 이날은 3·1 만세운동의 정점에서 이곳 원평지역의 장터를 배경으로 독립을 향한 만세운동이 있었던 지역이다. 2019년 100주년을 맞이해 만세운동 재현행사와 기념식이 열려 취재했다.<편집자 주>
# 100년의 역사를 통한 민족의 혼
지난 19일 오전 10시 전북 김제 원평이 낳은 독립운동가 이종희장군의 생가가 있는 원평장터 3·1 만세운동광장에 지역주민 300여 명이 집결했다. 박준배 김제시장을 비롯해 김효순 김제교육장과 광주보훈지청장등을 비롯한 유관기관의 관계자등이 참석한 가운데 식전행사와 기념식이 열렸다.
김제 원평지역은 예로부터 교통요지로 통하면서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거점지역인 구미란에서 최후의 전투를 가진 곳으로 결국 동학농민군들이 패퇴하고 쓰러졌던 지역이다. 지금도 구미란 뒷산에는 당시 전투를 벌였던 동학농민군의 흔적이 남아 우리의 가슴아픈 역사를 보여주는 지역이다. 또한 동학농민군들의 자치통치기구였던 집강소가 전국에서는 유일하게 복원보전돼 역사의 생생한 기록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지역이다.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등 3개 단체 공동으로 주관한 금년 100주년 기념행사는 조은성과 청소년무용단이 독립투사의 넋을 위로하며 자주독립을 기뻐하는 춤을 공연했고, 소프라노 김진희씨가 열창하는 강건너 봄이 오듯과 그리운 금강산을 노래해 박수 갈채를 받았다. 또한 사)지평선팜합창단이 심춘택 지휘자의 지도로 홀로아리랑을 불러 심금을 울렸다.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1987년에 모악향토문화연구회(회장 故최순식)에서 ‘김덕명장군 추모비’를 건립하는 것으로 최초의 기념사업이 시작됐고, 최순식 선생이 지내온 동학농민군위령제를 1997년부터 구미란주민들이 마을행사로 주관했다. 2008년 7월에 주민들이 ‘원평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했고, 그 뜻이 김제 전역으로 전해지면서 12월 22일에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창립됐으며 2009년 3월에 사단법인이 설립되고, 초대이사장 고명역씨가 재직해 많은 활동을 하는 단체이다. 이날 역시 매년 중요한 기일에 맞춰 실시하는 행사로 100주년의 3·1 만세운동의 뜻을 기리는 행사가 됐다.
1919년 3월 19일, 이전 3월 1일날 한양에서 울려퍼진 독립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 전주를 거쳐 이곳 원평까지 전해졌다. 당시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돼 있는데 원평지역에서 약 5km 떨어진 수류면 구월리의 청년 배세동이 4월 13일 전주읍장에 갔다가 만세 운동의 현장을 목격하고 돌아온 뒤 16일 같은 마을의 전도명(田道明), 전도근(田道根), 전부명(田富明), 이병섭(李秉燮), 김성수(金成受) 등과 함께 의논해 20일 원평장날을 기해 만세 시위를 펼칠 것을 결정했다. 배세동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제작 등을 준비했고, 이병섭 등은 각지의 동지를 규합했다.
# 원평 3·1 독립만세운동의 전개
3월 20일 오후 당시 김제군의 동남쪽 원평리 원평장터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전도근과 전부명 등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 주고, 배세동은 대형 태극기를 게양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만세 운동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자 김대희(金大熙) 등 수백 명이 시장 곳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독립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군중이 모이는 곳을 감시하던 경찰에게 원평 시위대는 강제 해산됐고, 배세동 등 주동자 10여 명이 체포·구금됐다. 시위의 핵심 인물인 배세동 등 10여 명은 재판에 회부돼 6개월에서 1년간의 실형을 받고 복역했다.
사실 원평지역은 알려진대로 동학혁명의 상징적인 장군인 전봉준의 외가가 있던 지역으로 알려졌다. 당시 금구원평의 동학농민들의 취회(聚會)가 일만명 이상으로 모여 큰 파장을 일으켰을 정도의 국권회복과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지역이다.
원평에 있는 학수제에는 김덕명장군과 이종희장군 그리고 최경선 장군 등의 추모비가 있고 매년 제사를 지낸다. 이처럼 원평지역은 나라사랑의 일념으로 가득찬 민족정기의 산실이었다.
매년 원평장터 3.1만세운동 기념비가 있는 곳에서는 재현행사가 열려 그동안 동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금산중학교 학생들이 재현연극을 통해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도록 했는데, 아쉽게도 지난해에 이어 금년에도 이러한 재현극을 주민들이 준비하도록 했고 학생들은 만세운동의 동선을 따라 원평장터를 돌면서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기도 했다.
금년은 만세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 이기도 해 행사장 주변에서는 지역주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체험할 수 있는 행사체험 부스를 설치하면서 태극기와 동학농민모형등을 직접 해 볼 수 있도록 했고, 주변에는 당시 빛바랜 사진을 게재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갖도록 했다.
이날 김제동학혁명기념사업회의 최고원 이사는 “매년 이맘때가 오면 즐거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시간이 옵니다. 예전 우리의 선조들이 나라사랑의 일념으로 조국과 지역사회의 혼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대다수 주민들의 협력과 참여로 이뤄진 이날이 요즈음은 많이 퇴색돼 일회성 행사로 전락되는 듯한 아쉬움입니다”라고 해 행사위주보다는 역사속의 그날을 통해 우리의 부단한 정신무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했다.
# 시대가 전해준 김제 원평의 나라사랑 일념
앞서 기술한 것처럼 원평은 전봉준 장군의 외가로 알려져 있고 그만큼 자부심이 높은 지역이다. 하지만 2만명에 가까운 지역주민들이 이제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옮겨가는 와중에 인구가 거의 5천명 수준으로 감소하여 아쉬움을 나타낸다.
대부분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면서도 민족의 자부심과 긍지를 잃지 않았고 모악산을 중심으로 하는 중심거주지의 원평지역이 금산면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종교의 성지로 각광을 받고 있고 역사적인 실체를 보전하고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이처럼 사상과 이념의 색다른 종교색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들의 어울림은 매우 공통적인 부문이 많았다. 이것은 모악산이 가지는 정기(正氣)의 풍경이 나타내주는 것으로 주민들이 모여 살고 있는 시가지 형태가 100년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고 전통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보인다.
3·20 원평장터 만세운동은 동선은 짧지만 강력한 시장터의 기운이 시가지를 압도한다. 전체 길이 약 500미터의 직선거리를 노점상과 상가들의 시장터 개념으로 보면 매우 강력한 만세운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젊은시절의 만세운동 주모자들은 오직 나라사랑으로 피맺힌 한을 독립으로 이끌기 위한 작은 몸짓이었을 것이다.
오늘도 원평장터는 매월 4일과 9일에는 장터가 어김없이 열린다. 지금은 장터를 바라보는 작은 구릉위에 당시 만세운동 기념비가 설립되고 바로 이웃에 이종희장군 상가터를 복원해 학생들의 나라사랑 일념에 대한 정신교육의 수양터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100여미터 거리에 있는 동학혁명원평 집강소와 학수제에는 나라사랑의 원평지역 인물들에 대한 추모비가 전시돼 있어 다시한번 그때 그날의 함성을 되새기곤 한다.
이 땅의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원평은 나라사랑의 보국일념으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이경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