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문화의 기본적 이미지는 시각과 청각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종합예술이 있고 기본가치만을 추구하는 시각과 청각 예술이 존재한다. 미술작품의 본류에서 독특한 문화예술의 영역으로 자리 잡은 한국미술의 다른 한 장르인 서각 작품의 소개하고 전주에서 전시되는 작가를 통해 새로운 의미의 예술세계를 볼 수 있도록 했다. <편집자 주>
# 서각(書刻) 예술의 역사적 의미
서각(書刻) 예술이라고 하면 일반 대중에게는 생소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미술작품이다. 일반적으로 결이 좋은 느티나무 등에 글자나 그림을 새겨넣는 방법으로 세밀한 예술 가치를 창조하여 조각하는 작품을 서각(書刻)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서각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언어의 표기 대상이었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는 글자나 그림으로 엮어진 내용을 대나무 등에 표기해 기록함으로써 의사전달의 수단으로 삼았고 종이가 발명됐어도 나뭇결 위에 붓으로 새겨넣은 초기 서각 형태의 문화적 관습이 한반도의 주요지역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와 사회적으로 기록하기 위한 수단의 방법들이 차츰 미술 형태로 발전되면서 나뭇결에 붓으로 그려 넣는 것이 아닌 아예 음각과 양악의 조화와 균형을 이뤄 조각을 통해 좀 더 진전된 미술품으로 일취월장하게 된 것이다.
사실 서각의 기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하게 분포된 역사적 사실이 있다. 중국의 서예사에서는 기원전 27세기에 황제의 사관인 창힐은 새나 동물의 발자국을 관찰해 나무에다 눈금 같이 서계 했다고 했었다. 서양의 경우 기원전 18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인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과 A.D 273년, 인도 아소카왕의 비문이 돌에 새겨져 전해지고 있다.
이런 사실을 유추해보면 요즈음 서각을 말할 때 꼭 나무에다 새기는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와 함께 갑골문자도 지금으로부터 약 4,000여 년 전인 상은대에 거북이나 동물의 뼈에 새긴 글자를 새긴 것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글씨를 새겨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 서각의 역사는 길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의 경우 서각의 유적이 많지 않아 정확한 시기를 가름하기는 어렵지만, 고조선 시대부터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는 문화교류가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되면서 2~3세기경부터 언어로 표현되는 한자가 사용되었을 것이지만 아직 당시의 기록이 새겨진 유적이 발견된 것은 많지 않다.
현재 알려진 것으로는 진나라 문자가 새겨진 무기와 한나라 시대에 주조된 명문이 있는 동종이 평양 부근에서 발견돼 문자 유적으로는 최고의 것에 속한다고 한다. 결국, 우리나라에서도 목재나 금속류에 무엇인가 글자를 새겨 남기고자 하는 행위가 이미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본다.
# 한반도에서의 서각(書刻)에 대한 기록
이런 의미를 좀 더 구체화하면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고려 고종 19년(AD1282), 대장경 주조를 위해 중앙에 도감을 뒀고, 그 안에는 각자장이 있어 경판, 주조 등 판각의 일을 하게 했다는 경국대전의 기록과 조선조 후기 윤종의의 수택본인 대동여지비고 공장조에 관수용의 공장을 세분화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중앙에는 은장, 화장, 인장, 금박장, 칠장, 필장, 조각장, 각자장 등을 두었고, 지방에는 원선장, 유구장 등을 둬 각 분야에서 일하게 했다고 한다.
특히 목판에 각자 한 판각본으로는 1977년 10월 3일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세계 최고의 목각 본임이 밝혀졌다. 현재도 우리 주변에 볼 수 있는 옛 사찰과 고궁의 현판이나 주련, 해인사에 소장된 판각본 팔만대장경을 보면 불교의 융성과 더불어 신라 시대부터 경판인쇄가 퍽 활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활자 발명 이전엔 주로 나무에 판각하여 서책으로 만들었으므로 서각은 우리의 문화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서각은 인쇄 매체로서뿐만 아니라 건축의 현판, 편액, 주련은 물론 문갑, 필통 등 나무 그리고 석재나 금속에까지 실로 광범위하게 새겨져 기록의 역사와 함께 장식이 예술에도 한 몫을 거들어 왔다.
우리고장의 익산 미륵사지탑 해체과정에서 발굴된 금속 동판 역시 금판에 새긴 서각의 일종으로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남게 됐다.
하지만 당시 이러한 일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에 대한 하대 사상은 오늘까지도 앙금처럼 남아 있어 서각을 서각다운 것으로 발전시키는 데는 큰 장애 요인이 됐고 이와 함께 불교의 쇠퇴와 일제 식민지 치하의 전통문화 말살 정책, 그리고 근래에 와서는 외래문화의 선호로 서구화하는 추세여서 서각은 이제 그 맥을 찾아볼 길이 없는 한계에까지 이르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에 자랑하고 있는 우리나라 금속활자의 발명은 반대로 판각의 일고 없어졌고 건물에 현판을 달아야 할 건축도 없어지는 등 서각을 해야 할 일이 줄어들게 됐다.
이렇게 잊히고 사라지던 서각이 1971년 서울의 인사동에 있는 한국 서각사를 중심으로 다시 맥을 잇게 된다. 이후 꾸준한 작품활동을 기치로 우리니라 서각은 한 가닥 희망을 품게 된다. 바로 서각의 부활을 기치로 걸고 조직된 한국서각협회는 전국적으로 수많은 회원들이 맥을 잇고 있으며 회원들은 창작 서각에 관심을 두고 전통 서각과는 다른 현대 서각의 연구에 전력해 서각의 새로운 모습을 찾기에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 전, 전주서각협회장 지산 곽종숙 작가의 전시회
지난해 10월에 제4회 한국서각협회 전주지부展이 전주한옥마을 오목교 팔각정 일원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전주천변 풀숲 위에 전시된 작품들은 서각의 존재를 다시 한번 일깨워 준 최고의 작품들로 평가받기도 했다. 다양한 글씨와 그림들이 형형색색의 조화를 이뤄 나무에 새긴 작품들로 역사의 숨결을 가진 새롭게 변신한 작품으로 관람객들의 찬사를 받았다.
당시 전주서각협회장 지산 곽종숙 회장은 “서각작품은 단순한 미술 장르가 아닌 삶의 현장에서 한 올 한 올 엮어가는 실타래처럼 혼신의 힘을 기울인 창조의 생활작품입니다” 라고 해 회원들의 전시작품들이 단순한 전시용 작품들이 아닌 참여 작가들이 생활과 함께하는 최고의 서각 작품으로 그 존재를 알리기도 했다.
한편 전주권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서각가인 곽종숙 전, 전주서각협회 회장의 개인 전시회가 열리는 것을 주목해 본다. 그녀는 강암서실에서 서예공부를 하면서 어느 비구니 스님을 만나게 된다. 아쉽게도 그 비구니 스님을 세상을 떠났지만 서예공부를 하면서 이를 통해 서각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의미 있는 예술창조를 알게 되었고 이후 꾸준한 작품활동을 통해 좀 더 발전된 서각 예술의 선구적 역할을 다하고 있는 작가이다.
지금도 전주 남고산 자락의 공방에서는 작품활동을 위한 서각 작업에 여념이 없다. 그녀는 이번 전시회의 작가 노트에서 "여기 마음의 벗을 기리며 오직 한길로만 몰두했던 서각(書刻) 작품들이 있습니다. 비가 오던 날, 눈이 내리던 날, 천둥이 치던 날, 모진 바람이 불던 날에도 열정의 그 날은 멈추질 않았습니다. 남고산 자락 작은 공방에서 환희와 기쁨으로 엮어가는 작품세계는 인생의 중심을 한곳으로 모이게 했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토대로 양각과 음각의 조화를 이루던 그때의 작품은 오늘의 작은 설렘으로 이렇게 보이게 됐습니다"라고 해 작품세계의 열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오는 19일 시작을 알리는 현판의 서각 작품들로 전북예술회관에서 열리는 전시회는 전주시민들의 새로운 문화창조의 예술작품을 보게 할 것이다. 전시회를 관람하면서 서각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이해하고 더불어 오늘의 삶에 대한 정서함양과 새로운 문화가치의 역동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행운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경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