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기만과 거짓말…사법부 불신 어디까지

지난 1989년 4월 15일 노팅엄 포레스트와 리버풀의 FA컵 준결승 경기가 열린 영국 셰필드 힐스보로 경기장에서 관중 96명이 압사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힐스보로 참사’라 불린다. 참사 직후 영국 정부는 훌리건들의 안전불감증 탓으로 사건을 무마하려 했고, 사건 전말을 은폐했다. 경찰 역시 광적인 팬들 때문으로 돌렸다. 그러나 몇 개월 전 ‘힐스보로 참사는 팬들의 잘못이 아니라 경찰의 태만에 의한 과실치사’라는 평결이 나왔다. 단순 사고사라는 과거 판결이 21년 만에 번복된 것이다. 배심원단은 "완전한 직무태만에 의한 과실치사의 책임이 있다"면서 경찰의 치명적 실수로 힐스보로 참사가 유발됐다고 판단했다. 유족들은 성명을 통해 "힐스보로 참사는 비극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기만과 거짓말의 얘기, 진실과 정의를 무너뜨린 조직의 집단방어의 이야기"라고 밝혔다.

불안과 위험이 도처에 산재해 있는 현대적 삶에서 재난과 사고는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 이를 미리 예방하는 것, 그리고 만일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즉각적으로 대처해 피해를 최소화하고 효율적인 구난작업을 하는 한편 그 사태의 직·간접적인 피해자들을 끝까지 치유하고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일을 하라고 국가가 존재한다. 그러나 비극적인 것은, 국가는 이를 제대로 하지 않거나 책임을 회피하거나 심지어 피해자들에게 그 원인과 책임까지 전가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이 현대사회 곳곳에서 재연된다는 게 비극이다.

우연의 일치라고나 할까. 닮아도 너무 많이 닮았다. 1999년 ‘삼례 나라슈퍼 강도 치사사건’과 이듬해 발생한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두 사건 모두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소년들이 살인범으로 지목된다. 소년이 감옥에 가 있는 동안 새로운 용의자가 등장했지만 석연치 않은 이유로 풀려난다. 성인이 된 소년은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며 재심을 청구한다. 분명 다른 사건인데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같다. “경찰 폭행을 견디다 못해 허위 자백했다”는 것이다. 결국 삼례 나라슈퍼 강도 치사사건 피의자로 몰린 세 명의 소년은 각각 3~6년을 감옥에서 살았고,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에 연루된 당시 15세의 한 소년은 10년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이 두 사건 모두 범인은 따로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고, 이들은 옥고를 모두 치르고 한참의 세월이 지난 뒤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소년들이 감옥에 가 있는 동안 두 사건 모두 또 다른 용의자가 등장했고, 심지어 실제 범인이 경찰서에 찾아와 자신이 살인자라고 자수를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새로운 용의자의 자백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엊그제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 사건 재심 선고 공판에서 광주고법 제1형사부는 최모(36)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무려 16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최씨는 소년에서 중년으로 변했다. 그 억울하고 쓰라린 세월이 무엇으로 보상될까. 도내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두 건이 잇달아 무죄로 밝혀지면서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이 땅의 사법 정의가 살아 있음을 법원이 보여줬다’는 상투적이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투 정도로나 자위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