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관리공단은 정부의 출자에 의해 설립돼 보건복지부의 관리 감독 하에 있는 공공기관이다. 국민 노후를 책임지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고 있다는 점에서 ‘공적부조(公的扶助)’의 책무가 막중하다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연금’은 국민들이 노후를 대비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다. 그러나 이를 관리·운용하는 국가기관이 국민의 이해가 아니라 정치권력과 특정 재벌의 이해를 위해 자산을 운용한다면 국민 호주머니를 미리 털어 권력자와 재벌에게 몰아주는 중대 범죄가 될 것이다. 국민연금이 이런 불신의 덫에 걸렸다. 지난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수많은 주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합병에 찬성표를 던진 것이 화근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추진 당시부터 합병비율이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지나치게 불리하게 책정됐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그럼에도 지난해 7월 주총에서 결국 합병 안이 통과됐다. 당시 삼성물산의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찬성 의결권을 행사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로 인해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은 삼성물산이 보유하고 있는 그룹 핵심계열사인 삼성전자 주식 8조원 어치를 거저 인수한 셈이 됐다. 국민연금이 찬성 의결권을 행사한 것을 놓고 이면에서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다는 말이 무성했다. 최순실 게이트가 붉어지면서 그 같은 소문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최순실씨가 국민연금을 통해 삼성그룹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도와주고 그 대가로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청년희망재단에 출연금을 받았다는 의혹의 그것이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된 삼성의 대규모 기금 출연은 사실상 이재용 삼성부회장의 경영권 강화를 위한 뇌물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합병 찬반 의결권 행사 전문위원에게 청와대와 당시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 전화를 걸어 찬성을 종용했다는 증언도 최근 나왔다. 그는 지금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는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에 취임할 때 논란이 많았다. 지난해 8월 ‘메르스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한 그는 4개월 만에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으로 선임됐다. 당시 국민연금 노조는 “메르스 확산을 방치해 38명의 생명을 앗아간 장본인인 문형표 전 장관은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될 자격이 없다”고 극구 반대했다. 그는 또 지난달 열린 국민연금공단 국정감사에서 말을 180도 바꿔 내년 2월 전주 이전이 예정돼 있는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의 “공사화 필요” 발언으로 전북도민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문 이사장은 복지부 장관 시절 ‘기금운용본부 공사화’를 추진했던 인물로 박근혜 정부의 대표적인 ‘들러리 맨’이다.
국민의 소중한 노후자금을 관리하는 국민연금이 돈을 불리지는 못할망정 재벌의 배를 불리기 위해 뻔히 손실이 날 짓을 했다면 문제가 이만저만 심각한 게 아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가기 마련이다. 이런 식으로 국민연금 재정이 축나다 보면 결국 국민이 부담해야할 연금 보험료 인상이나 노후 연금 수령액을 줄이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국민 미래의 삶을 암울하게 하는 국민연금의 무책임한 행태가 있다면 반드시 엄중한 단죄를 내려야 마땅하다. 검찰이든 특별검사든 국민 절반이 꼬박꼬박 내 은퇴 뒤 생활비로 쓰여야 할 돈을 정부가 재벌을 위해 구멍을 냈는지 이번 기회에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