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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들에게 면죄부 주는 청문회

국내 재계 순위 맨 윗단에 있는 굴지의 대기업 총수 9명이 단체로 국회 청문회장에 섰다. 이런 진풍경은 지난 1988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일해재단 모금 비리 청문회 이후 28년 만에 처음이다. 정경유착의 부끄럽고 추악하기까지 한 민낯이 TV생중계를 통해 전 국민 앞에 드러났다. 국회 청문회장에서 증인들의 고전적인 답변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한 치도 달라진 게 없었다. “송구스럽다. 잘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정토록 하겠다. 앞으로는 이 같은 불미스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재벌 총수들의 답변은 시종일관 과거 청문회의 판박이와 같다. 이쯤 되면 이건 생방송이 아니다. 마치 예전 방송을 다시 보는 느낌이다. 동문서답도 가관이 아니다.

명색이 국회는 이 나라 국민들을 대표하는 최고의 입법·의결기관인데, 이런 곳에서 온 국민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 국회 청문회라는 게 이 지경이다. 이는 실추된 국회의 권위나 의원들의 함량 미달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재벌들을 단죄하기 위한 청문회장이 오히려 이들에게 면죄부만 주는 꼴이 되고 있다. 하긴 매번 재벌 청문회는 그랬다.

각설하고,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우리 사회에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듯했던 ‘정경유착’이라는 단어가 다시 무대 위로 등장했다. 정경유착은 1960~70년대 고도 성장기에 재벌 중심의 압축 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권력자가 사업상의 각종 특혜를 제공하는 대가로 기업들은 뒷돈을 줬다. 정부가 특혜를 주는 수단은 중화학산업 할당, 세금 감면, 금융 지원, 노조 활동 제한 등 다양했다. 부실기업 인수 과정에서 혜택을 제공하거나 알짜배기 공기업을 넘겨줬다. 그 결과로 재벌은 급속도로 팽창했다. 재벌은 이권을 챙기고자 나서서 돈을 주거나, 최소한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고 보험성 돈을 건넸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지난 1992년 정계에 진출하면서 밝힌 내용을 보면 이렇다. “박정희 대통령 때는 한번에 5억원씩 내다 마지막에는 20억원씩 냈고, 전두환 대통령 때는 추석 때 20억원, 연말에 30억원을 냈다. 6공 들어서는 처음에는 5공 때와 같이 20억원 내지 30억원씩으로 올렸고 이후 50억원을 낸 뒤 마지막으로 90년 말 100억원을 냈다.”

그러나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사실을 국민들 대다수는 알고 있다. 우리나라 재벌 총수들이 국민들로부터 하나같이 ‘공공의 적’이 된 지 오래다.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재벌들처럼 국민들로부터 지탄 받는 나라는 흔치 않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간 담합인 정경유착은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고 경제를 망치는 암적 존재다. 재계는 “대통령이 직접 불러 돈을 달라는데 안 줄 수 없었다”며 자신들도 피해자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촛불집회 광장에선 “재벌도 공범이다”는 구호가 “박근혜 퇴진” 구호만큼 많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권력을 사유화하는 것을 알고도 묵인한 집권여당인 새누리당과 정부 관료들, 그런 부패한 권력에 검은 돈을 제공하고 잇속을 챙긴 부도덕한 재벌들에 대한 엄정한 처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정경유착의 고리를 제대로 끊어내지 못한다면 우리 미래 세대들도 똑같은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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