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1995년에 했던 이른바 ‘베이징 발언’이다.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치권을 꼬집은 것이다. 이 폭탄 발언은 한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그의 발인 이후 20여년이 지난 지금 ‘4류 정치’는 개선됐을까. “그렇다”고 답변할 국민은 몇 명이나 될까를 생각하면 대단히 회의적이다.
‘천태만상(千態萬象)이란’ 천 가지 모습과 만 가지 형상이라는 뜻으로, 사물의 모양이나 현상이 한결같지 않고 각각 모습과 모양이 다름을 이르는 말이다. 지방의원들의 재량사업비 비리 내용을 보면 천태만상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검찰의 지방의회 재량사업비 수사 결과 전모를 보면 뇌물수수 수법과 비리 내용은 충격적이다.
“브로커는 수주액의 40%, 이 중 의원이 10∼15% 가량 먹습니다.” 지방의원 재량사업비 비리로 구속기소 된 한 브로커가 검찰 조사에서 한 진술이다. 전주지검은 최근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전·현직 전북도의원 4명과 전주시의원 2명, 브로커 등 21명을 재판에 넘겼다. 이 가운데 4명은 불구속기소 됐다. 이들 전·현직 지방의원들은 초·중·고교 교단환경 개선과 의료용 온열기 설치, 아파트 체육시설·태양광 가로등 설치, 지자체 운동기구 구매 등 각종 숙원사업을 해결해 준다는 명목으로 브로커와 결탁했다.
의원과 일면식도 없던 설치 업자는 브로커를 통해 사업을 수주했다. 리베이트는 브로커를 통해 의원들에게 건네졌다. 지역구민에게 쓰여야 할 재량사업비는 온통 청탁성 뇌물로 버무려졌다. 한 전직 도의원은 자신의 회사 계좌로 돈을 챙기면서 판매이익으로 가장하는 파렴치한 모습까지 보였다.
급기야 전북도의회는 재량사업비 집행과 관련해 전·현직 도의원들이 비리에 줄줄이 연루되자 27일 공개적으로 이를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도의회는 이날 의원 일동의 성명서를 통해 “일부 전·현직 의원들이 특정 업체에 소규모 주민숙원사업 일감을 주고 리베이트를 받은 것으로 드러난 것에 대해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도의원들은 이 불미스런 사태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며 도덕성을 회복하고 지방의회의 투명성을 바로 세우는 자정의 기회로 삼겠다”고 덧붙였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속담인 것 같다.
단체장은 사업 계획과 그에 따른 예산을 짜고, 지방의원들은 그것을 심사하는 위치에 있다. 지방의원들이 재량사업비를 요구하는 것은 마치 회사 감사가 이사 역할까지 하겠다는 격이다. 자신들의 예산은 심사·검증의 사각지대에 두고, 자치단체 살림살이를 감시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지자체 예산을 감시해야 할 지방의원들이 편법으로 예산을 편성해 집행까지 하는 것은 직무유기이자 월권이다. 이는 집행부와 의회가 내통하면서 서로 봐주는 관계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재량사업비 문제를 지방의원들의 문제로만 보면 안 된다.
재량사업비는 단체장이 지방의원들을 회유하는 당근처럼 이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체장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재량사업비 집행 책임은 집행부의 몫이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