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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의 갑옷'에서 해방된 대통령 신년기자회견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한번은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이렇게 말했다. “내 언론팀은 항상 말리지만 더 질문하세요. 나는 기자회견을 좋아하고 매일 여러분과 얘기하기를 원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5년 1월 청와대에서 1년 만에 처음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 “소통이 부족하다”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국민과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지난 2년 동안도 민생 현장이라든가 정책현장이라든가 이런데 직접 가서 정말 터놓고 이야기도 듣고 제 생각도 이야기를 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그 후 국내 언론과 단 한 번도 공식 기자회견을 하지 않았다.





두 장면은 오바마와 박 전 대통령이 언론과 기자회견에 대한 인식에서 얼마나 대조적인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우선 둘 간 기자회견 횟수만 보더라도 엄청난 차이가 난다. 오바마는 2009년 1월 취임 이후 2015년 6월까지 6년 5개월 동안 211차례 기자회견을 했다. 그 기간 동안 무려 600회에 이르는 개별언론 인터뷰도 가졌다.





이와는 달리 박 전 대통령은 취임 후 2년 반 동안 단 두 차례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회견을 잘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들은 ‘보여주기 식 이벤트’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기자회견을 극도로 꺼리거나, 하더라도 질의응답을 생략하기 일쑤였다. 어떤 해는 신년 국정연설로 대신하고 말았다.





기자회견 형식과 내용도 한국과 미국은 매우 다르다. 미국에서는 사전에 짠 각본에 따라 진행되는 일이 결코 있을 수 없다. 백악관 대변인과 기자단이 미리 질문 내용이나 수위를 정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질문 기자도 사전 각본에 정해져 있지 않다. 미국 대통령 회견의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진지한 회견 중간중간 유머와 이에 따른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유머를 중시하는 미국의 정치·사회적 문화와 관련된 것이긴 하지만 효율적 회견을 위한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지난 11일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신년 기자회견을 가졌다. 문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은 지금까지 대통령 기자회견과 달리 기자들과 질문을 사전에 조율하지 않고 즉석으로 진행했다. 이날 분위기가 확 바뀐 신년 기자회견이 끝난 뒤 기자들 사이에서 “봉숭아학당 같았다, 즐거웠다”는 반응이 나왔다.





윤영찬 국민소통수석이 말한 “자유롭게 질문하고, 자유롭게 답변한다”는 신년기자회견 취지를 잘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외신 기자들도 ‘무(無)대본 자유질문’ 방식에 대해 호평을 내놨다.





한국은 기자회견에서 자칫 본질적 내용보다는 말실수 하나가 더 크게 다뤄질 경우에 대해 걱정하는 분위기가 많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천금처럼 무거워야 한다는 한국의 정치적 고정 관념도 작용한다. 민주주의가 일찍부터 발달한 미국, 독재 정치와 권위주의 대통령을 겪어온 한국의 차이다. 이날 TV를 통해 문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을 보면서 회견 내용의 본질과 경중을 떠나 국민들의 뇌리에 지긋지긋하게 박혀 있는 ‘권위의 갑옷’에서 잠시나마 해방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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