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출판한다는 의미의 ‘상재(上梓)’는 가래나무로 목판인쇄를 했던 데서 비롯된 말이다. 출판기념회에서 책을 받고 대가로 내는 돈 봉투에 주로 ‘축(祝) 상재’라고 쓴다. 정치인들은 출판기념회를 하면 정치자금법의 제한을 받지 않는 ‘축 상재’ 금일봉을 실컷 챙길 수 있다.
선거 시즌이 되면 어김없이 빠지지 않는 행사가 바로 정치인 출판 기념회라는 것이다. 오는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벌써부터 교육감이나 지방의원 출마 예상자들의 출판기념회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일부 출마예정자는 출판기념회에 이어 각 시·군을 돌며 지역교육의 발전 방안을 놓고 주민들과 소통하는 북 콘서트를 열거나 계획하고 있다.
그동안 출판기념회가 국회의원이나 선거를 앞둔 자치단체장, 지방의원, 교육감 후보들의 공공연한 ‘모금 창구’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책값이라는 명목으로 거두는 돈은 액수 제한이 없다. 1만원을 내든, 1억원을 내든 문제되지 않는다.
국회의원들은 정치자금법에 따라 후원금을 받을 수 있으나 이는 액수에서 법의 규제를 받는다. 때문에 상당수 의원은 출판기념회라는 법외 창구를 통해 수천만원 내지는 억대를 모금한다. 상임위와 관련된 기관이나 기업, 지방선거 후보 등 의원의 지지를 받으려는 정치 지망생들, 그리고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결혼식장처럼 출판기념회장에 줄을 선다.
출판기념회는 저자의 생각을 공유하고 좋은 책을 내는 저자와 출판사를 격려하는 문화적 행사다. 가뜩이나 디지털 문화로 출판 산업이 위축되는 상황에서 이런 모임은 활력소가 될 수 있다. 그런 좋은 취지의 행사를 정치인들이 오염시키고 있다. 상당수 정치인은 대필 등을 통해 쉽게 책을 만들고, 선거 등을 앞두고는 ‘모금 잔치’를 벌여 왔다.
출판기념회는 어떤 법적인 제재나 제한을 받지 않는다. 모금 한도에 대한 규정도 없고 받은 돈과 사용처를 공개할 의무도 없다. 세금도 없고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수사 당국이 모금 내역을 수사하거나 관심을 가진 적도 거의 없다. 그 때문에 편법적인 정치자금 모금 창구나 뇌물 수금 창구로 악용되고 있다. 출판기념회는 ‘치외법권’ 지대와 다름없는 셈이다. 국회의원 출판기념회의 경우 소속 상임위원회와 관련 있는 기업이나 단체, 공무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내는가 하면 역으로 로비 창구로도 이용하고 있다.
출판기념회 남용은 사회의 정신문화를 가볍게 만들고, 책과 지성에 대한 모독이다. 저자는 심혈을 기울여 책을 쓰고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조촐한 기념모임을 마련해주는 게 정도다. 선진국에선 이 정도도 드물고 대개 저자가 사인회를 갖는 수준이다. 한국에서는 정치인들 때문에 출판이 과시형 이벤트로 전락하고 있다.
규제도 필요하지만 정치권 스스로가 지성(知性)에 대한 의식을 향상시킨다는 차원에서 불필요한 출판기념회를 자제해야 한다. 관련법과 별도로 여야는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당내 규정 등으로 이를 적절히 통제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정치인이나 정치 지망생이 좋은 책을 썼으면 일반인처럼 그냥 서점에서 팔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