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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의 흔적 지우기… 영원한 권력은 없다

정치권력, 법 권력, 금전 권력 등 어느 집단이나 권력은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 가운데 ‘문화 권력’도 빼 놓을 수 없다. 문화 권력은 겉으로는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어느 집단의 권력 못지않게 막강하면서 생명력도 길다. 특히 예술가 집단은 ‘도제식 교육’에 깊숙이 길들여져 있어 스승과 제자 간 상하 관계가 매우 엄하다. 권력의 정점은 하나의 ‘왕국’이다. 그 왕국에 사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제지되지 않는 일탈과 방종을 일삼는 경우가 많다.





성 추행에 연루된 고은 시인의 말로가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그가 누구인가. 일반인들은 감이 범접하기조차 힘들 정도의 문화계 거장이자 문화 권력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해마다 노벨상 수상자 선정 시기가 다가오면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면서 국민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김대중 전 대통령 외엔 노벨상 수상자가 없으니 노벨상은 국민들의 자존심과 같은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은 시인의 평판이 어떠했든 간에 그의 노벨상 수상여부는 국민들의 지대한 관심사였다. 역사에 남을 노벨상 수상을 거부한 이들도 있는데, 노벨상을 향한 그의 집념은 대단했다. 집착에 가까웠다는 표현이 옳을 듯하다.





그의 기인(奇人) 기질은 문화계에서는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진 바다. 다만 그의 권력이 워낙 두터운지라 그의 기행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이 금기시 됐을 뿐이다. 결국은 그의 상식을 일탈한 행동이 한국 사회를 휘몰아치는 ‘미투’ 광풍에 단단히 휘말렸다. 제아무리 단단한 그의 권력이라 해도 이번만은 비켜갈 수 없게 생겼다.





이곳저곳에서 고은 시인의 흔적 지우기에 나서고 있다. 군산에서는 그와 관련해 추진되고 있던 각종 사업이 보류되거나 차질을 빚고 있다. 그의 문학관 건립이나 ‘고은 문화제’, ‘고은 시낭송 대회’ 등도 일단 보류한 상태다. 옛 도심권 시간여행마을 내 건물에 시인의 모습과 시구 등을 그리는 ‘고은 아트 벽화’사업도 차질이 불가피한 모양이다. 시인을 기리는 기념비나 시 간판을 철거하라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수원시도 올림픽공원 내 ‘평화의 소녀상’ 옆에 설치돼 있던 고은 시인의 추모 시비를 철거했다. ‘고은문학관’ 건립사업 철회도 발표했다. 등단 60주년을 기념해 추진할 예정이던 각종 문학행사도 모두 취소했다.





그의 작품도 중·고교 교과서에서 퇴출될 것으로 보인다. 국어 분야 검정교과서를 발행하는 일부 출판사들은 교과서 속 고은 시인의 작품을 다른 내용으로 바꿀 예정이라고 밝혔다.





세상에 영원불멸이란 없는 법이다. ‘개관사정(蓋棺事定)이라고, 사람은 죽은 후에야 비로소 그 사람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생전에는 아무도 감히 맞설 엄두를 못 내다가 사후에 결정적인 혹평을 받는 이도 많다.





성추행에 대한 고은 시인의 침묵과 부인은 납득하기 어렵다. 시인 최영미가 ‘괴물’의 행태를 고발한 지 한 달 넘게 침묵하던 그는 영국의 출판사와 외신을 통해 “부끄러운 행동을 한 적이 없다”며 집필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슨 글을 어디에 쓰겠다는 것인지 두고 볼 일이지만, "사과하고 용서받을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렸다"고 지적한 최영미 씨의 말이 실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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