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8년 10월 탈주범 지강헌은 다른 탈주범들과 인질극을 벌이는 중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후 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가 남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시대가 한참 흐른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지강헌 등은 돈과 권력이 있는 자는 특혜를 받고, 돈과 권력이 없으면 중형을 받는 사법부의 불공정한 심판에 분노한 것이다.
그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과 그 일가의 부정부패로 서민층의 상대적 박탈감은 말할 수 없이 깊었다. 이같은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소외계층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과 사법제도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았고, 이후 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단골메뉴가 되다시피 세간에 오르내리곤 했다.
잘 알다시피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돈이 있을 경우 무죄로 풀려나지만 돈이 없을 경우 유죄로 처벌받는다’는 뜻이다. 몇 년 전 법률소비자연대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80% 가량이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동의한다고 답한 적이 있다. 대한민국 사회의 사법부와 검찰에 대한 불신의 현주소를 나타내는 조사 결과로 볼 수 있다.
비서에 대한 성폭력 혐의로 기소됐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지난 14일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와 비서 김지은씨가 상호 지위상 위력관계인 점은 인정하면서도, 안 전 지사가 위력을 행사해 간음을 했다는 증명은 부족하다고 봤다. 위력관계는 있었으나 위력 행사는 없었다니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아먹기 어렵다. ‘이언령 비언령(귀에 걸면 귀 걸이, 코에 걸면 코 걸이)’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이번 무죄 선고를 두고 우리 사회가 또 다시 시끄럽다. 전북지역 시민·사회단체도 이번 판결을 두고 재판부를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미투운동과 함께 하는 전북시민행동’은 지난 16일 전주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최근 강간에 대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상황을 두루 살피는 대법원 판례의 흐름조차 따라가지 못한 판결”이라며 “여성이 성적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사회구조, 권력관계, 위력 등을 철저히 무시했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또 “안희정 전 지사는 정치·사회·경제적 권세를 가진 자의 대표적 사례이며 이 사건에 대한 제재는 우리 사회 변화의 지표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안 전 지사 무죄 판결을 보면서 앞서 언급한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에 빗대 ‘유권무죄 무권유죄(有權無罪 無權有罪)’란 말을 덧붙이고 싶다. 즉, ‘권력이 있는 자는 죄가 없고, 권력이 없는 자는 죄가 있다’는 뜻이다.
‘악법도 법이다’고 했다. 어쨌든 사법부의 판결은 존중돼야 마땅하지만, 이번 판결로 ‘미투’ 운동이 위축될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미투 운동을 피해 당사자들의 한풀이 정도로 보아서는 안 된다. 미투 운동은 성폭력 피해자를 구제함과 동시에 가해자에 대한 법적·도덕적 응분의 책임을 묻는 행위이다. 더 나아가 여성 성폭력에 대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운동이다. 따라서 미투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