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피제(相避制)’는 원래 일정범위 내의 친족 간에는 같은 관청 또는 통속관계에 있는 관청에서 근무할 수 없게 하거나, 연고가 있는 관직을 제수할 수 없게 한 제도다. 이는 관료체계의 원활한 운영과 권력의 집중·전횡을 막기 위해 도입됐다. 고려시대부터 실시됐으나 엄격하게 적용된 것은 조선시대부터다.
사문화되다시피 했던 상피제가 난데없이 21세기 고교에 소환돼 교육 현장에서 찬반 논란이 거세다. 발단은 최근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온 서울 한 고교 교무부장의 ‘쌍둥이 자녀 전교 1등’ 사건이다. 시험지 유출 의혹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까지 번진데 놀란 교육부가 응급처방을 내놓은 것이다. 내년 3월부터 교사 부모와 자녀가 한 고교에 다니지 못하게 하는 게 골자다. 부정의 소지를 원천봉쇄하겠다는 의도다.
서울시교육청을 비롯 대전·인천·광주시 교육청 등이 상피제 도입을 검토하거나 도입키로 했다. 전북도의회에서도 상피제 도입 필요성이 제기됐다. 김희수 의원은 지난 16일 열린 교육지원청 행정사무감사에서 “교사 상피제를 시행하면 시험성적 관리나 출제 관리에 부정 개입의 소지가 없게 될 것”이라며 “국공립학교뿐만 아니라 사립학교도 상피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반면, 전북교육청은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교육부의 방침이 나오자 김승환 교육감은 확대간부회의를 통해 “상피제는 교사를 잠재적 범죄인으로 몰아 교원의 자존감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김 교육감은 “설사 교사와 자녀가 같은 학교에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학년에 있지 못하도록 하는 등의 조처를 하고 있다"며 "교육계가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보다는 훨씬 더 강화된 자기규제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피제는 학교 내 공정성 확보라는 장점도 있지만 교원 불신을 조장한다는 의견이 만만치 않아서다. 그러나 부정 원천봉쇄라는 취지에도 현대판 상피제를 보는 시선은 사뭇 다르다. ‘선택권 제한’ ‘불신 사회 조장’ 등을 이유로 항의와 비난이 거세다. 무엇보다 헌법이 보장한 개인의 선택권을 침해하는 행위란 거다.
전국에는 2천360개 고등학교가 있다. 이중 23.7% 560개 고교의 교사 1천5명과 자녀학생 1천50명이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 전북지역의 경우 고교에서 자녀와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는 12개 시·군 27개 학교에 67명에 달하고 있다. 이들 모두 상피제 대상이다. 만약 제도가 시행되는 지역은 내년 새 학기에 모두 전근이나 전학을 해야 한다. 큰 소동이 아닐 수 없다.
상피제가 예방차원에서 나온 고육책이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공직을 수행하는 자가 어디에서 근무하든, 맡은 직책이 무엇이든 법령에 의해 공직을 수행하면 그만이다. 법령을 어겼을 때 엄격하게 조치하면 된다. 상피제 도입은 자칫 교사 모두에게 범죄 가능성을 두는 일이 될 수 있다. 교사의 양심을 제도로 규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실효성이 의심되는 제도를 고집하다 ‘교각살우’의 우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