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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성어, 현학적 수사는 말장난일 뿐이다

해마다 연말연시가 되면 그 해를 대표하거나 새해 소망을 담은 ‘사자성어’가 화제 거리로 회자되곤 한다. 헌데 새해의 사자성어는 한결같이 꿈과 희망의 메시지로 가득한 반면, 한 해를 마무리할 즈음에 발표되는 사자성어는 온통 실망과 좌절, 비탄이 섞인 내용 일색으로 가득 채워진다. 안타까울 노릇이다.


유래 없는 취업 한파가 몰아친 올해 구직자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는 뜻의 ‘다사다망(多事多忙)’이었다. 마른 나무나 불기 없는 재와 같이 생기와 의욕이 없다는 뜻의 ‘고목사회(枯木死灰)’를 다음으로 꼽았다. 갈수록 심화하는 취업난 속에서 의욕마저 잃어가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스스로 제 갈 길을 찾아가겠다는 ‘각자도생(各自圖生)’, 많은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전전반측(輾轉反側)’도 선택을 받아 힘들고 어려운 한해였음을 대변했다. 최저임금 인상과 경기악화까지 겹친 자영업자들은 ‘노이무공(勞而無功)’을 올해의 사자성어로 꼽았다. 



온갖 애를 썼지만 보람이 없었다는 뜻이다. 우리의 어려운 경제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근래 발표되는 사자성어 중 가장 권위 있는 것은 교수신문이 선정하는 한자어다. 교수신문은 2001년부터 교수들을 대상으로 한 해를 규정하는 사자성어를 선정해 발표하자 국민들은 촌철살인이라며 무릎을 쳤다.



대학교수들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임중도원(任重道遠)’을 꼽았다.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뜻으로, 문재인 정부의 개혁이 중단 없이 추진되기를 바란다는 당부다. 이어 ‘구름만 가득 끼어 있고 비는 내리지 않는다’는 의미의 ‘밀운불우(密雲不雨)’가 두 번째로 꼽혔다.



각 자치단체들도 예외 없이 새해의 염원이 담긴 사자성어를 내놓고 있다. 전북도는 2019년 사자성어로 ‘절차탁마(切磋琢磨)’를 선정했다. ‘원석을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고 갈아 빛을 내는데 오랜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어떤 일을 하는데 최선을 다해 노력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도는 그간 쌓아온 경험과 성과를 바탕으로 정책 추진 시 절차탁마 자세로 잘하는 것은 더욱 갈고 닦아 기존 사업의 경쟁력 강화를 통해 성과를 이뤄가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익산시의회는 ‘세답족백(洗踏足白·남을 위해 한 일이 자기에게도 이득이 됨)’을, 고창군은 ‘군민이 알기 쉬운 공감행정으로 군민 속으로 가까이 가겠다’는 의미의 ‘평이근민(平易近民)’을, 완주군은 ‘뜻이 있으면 이뤄진다’는 뜻을 담은 ‘유지사성(有志事成)’을 꼽았다.



일찍이 서양에서는 인간이 좀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방편으로 두 가지를 꼽았다. 하나는 자신이 직접 실패를 경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의 실패를 거울로 삼는 것이라고 했다. 연말연초 마음의 양식이 되는 경구를 주고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언중(言衆)과 지나치게 동떨어진 현학적 수사는 소모적인 말장난에 그칠 뿐이다. 사자성어든 신년휘호든 울림이 있으려면 상대에 대한 배려가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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