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의 수탁자 책임원칙)’가 단단히 위력을 발휘했다. 자본시장의 ‘집사(스튜어드)’가 잘못된 경영을 한 기업 총수를 끌어내렸다. 그 중심에는 국민연금이 있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대한항공 경영권을 잃게 되자 금융투자업계는 ‘종이호랑이’ 국민연금의 변신이 결정타라고 분석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가들이 고객의 자산을 맡아 관리하는 집사처럼 연금 가입자의 재산이 투자된 기업 가치를 충실히 관리하도록 하는 지침이다.
조양호 회장은 땅콩회항으로 대표되는 가족들의 갑질 논란으로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대한항공 주주들은 지난 27일 정기 주주총회를 열고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을 찬성 64.1%, 반대 35.9%로 부결시켰다. 대한항공 정관은 '사내이사 선임은 주총 참석 주주의 3분의 2 이상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조 회장은 2.5% 남짓한 지분을 추가로 확보하지 못해 경영권을 지켜내지 못했다.
한국의 기업풍토에서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대한항공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의 지분률은 11.56%.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행사에 대한항공의 소액주주들과 외국인 투자자들이 동참한 것이 조 회장 사퇴를 이끌어내는 요인이 됐다. 조 회장의 경영 능력 문제가 아닌 본인과 일가의 도덕성 문제가 발목을 잡은 것이다.
이번 대한항공 주총은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가 사실상 오너 기업 총수의 생사여탈권을 갖게 된 첫 사례다. 주총을 준비 중인 다른 기업들도 국민연금의 결정에 초긴장할 수밖에 없게 됐다. 조 회장의 퇴진으로 ‘철옹성’ 같았던 국내 기업의 폐쇄적이고 왜곡된 지배구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진단이 나오는 이유다.투자를 하는데 있어 해당 기업의 ‘오너 리스크’를 파악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절차 가운데 하나다. 오너 리스크가 기업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오너 리스크란 오너(총수)의 독단 경영이 기업의 경영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을 말한다. 오너에게 모든것이 집중돼 있다는 것은 오너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기업에 끼칠 수 있는 위험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권오현 삼성전자 회장은 “최악의 리더는 조직의 미래를 망치는 리더”라고 지적한 바 있다. 오너의 오판과 그릇된 행동이 수천, 수만명 임직원의 일자리를 잃게 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조양호 회장의 퇴진은 오너 기업의 도덕성에 경종을 울렸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각별하다. 다만, 재계는 정부가 ‘대기업 길들이기’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국민연금이 국내 주요 기업들의 대주주이기 때문이다. 재계가 비판 성명을 내고, 국민연금 내부에서 반대 의결권 행사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인 배경이다.
국민연금은 이런 우려를 불식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 압력을 배제하고 수익률 제고에 한정해 주주권을 행사하는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 정치적 논리가 개입되는 일이 결코 있어선 안 될 것이란 말이다. 기업 경영 참여도 좋지만 투자수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기관임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