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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지정환 신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세상에는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떠난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지난 13일 88세의 일기로 세상과 작별한 지정환 (본명 세스테벤스 디디에)신부 역시 ‘이름’을 남기고 떠난 ‘참 종교인’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한국 치즈의 아버지’, ‘임실 치즈의 대부’로 불리는 푸른 눈의 지정환 신부는 김치의 나라에서 치즈로 기적을 일으켰다.


벨기에 브뤼셀의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1959년 12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 땅을 밟은 그는 60년간 ‘지정환’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민둥산에 풀밖에 자라지 않던 척박한 땅에서 막막한 심정으로 시작했던 치즈 만들기는 임실 치즈, 그리고 국내 치즈산업의 오늘을 일궈냈다. 


임실치즈테마파크는 연간 20만명이 넘게 찾는 치즈 관광지로 탈바꿈했고, 지역경제발전의 초석이 됐다. 현재 임실치즈가 지역사회에 끼치는 경제효과는 1000억원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적으로 임실치즈피자 프랜차이즈 업체만 20여개, 임실치즈를 쓰는 브랜드만 70여개다. 그는 생전에 “대한민국 치즈의 원조라는 브랜드는 그냥 얻은 게 아니고 임실 주민들과 ‘다 같이 잘 살아보자’는 공동체 정신과 협력으로 일군 것”이라고 말해 왔다.


지 신부의 이름이 빛이 나는 것은 단순히 ‘치즈의 기적’을 일으켰다는 사실 때문만이 결코 아니다. 지 신부는 목표했던 치즈 생산을 이루자 대가 없이 임실치즈공장을 주민 협동조합으로 변경한 뒤 운영권·소유권을 조합에 전부 넘겼다. 그는 당시 ‘공수신퇴(功遂身退)’라는 사자성어를 남겼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공을 이루었으면 물러나야 한다’는 뜻이다.


1970년대 유신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체포돼 추방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유신 정권은 농촌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그를 추방하지 않았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이 벌어진 뒤에는 우유트럭을 몰고 광주로 가기도 했다. 임실 치즈사업이 한창이던 1981년 신경이 이상 증상을 보이는 ‘다발성 신경경화증’으로 다리가 불편해 고국인 벨기에로 떠났다. 3년 뒤 치료에 실패한 채 오른쪽 다리가 마비된 장애인의 몸으로 한국에 돌아 온 그는 완주군 소양면에 중증 장애인을 위한 재활센터 ‘무지개 가족’을 설립했다. 이곳에서 누워 지내야만 하는 중증 환자들의 욕창 치료와 운동 재활에 힘썼다. 이곳을 거쳐 현재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장애인만 수백여 명에 이른다. 지난 2004년 사제직에서 은퇴했지만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완주 소양 해월리에 ‘별아래’라는 집을 짓고 무지개가족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생활했다. 


2016년 법무부로부터 한국 치즈산업과 사회복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고 한국 국적을 취득해 진짜 한국인이 됐다. 지난해 초에는 창성창본을 신청해 ‘임실 지씨’의 시조가 됐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그였다. 그는 성직자로서 말을 전하는 것보다 행동하는 종교인으로서 평생을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살아왔다. 참다운 종교인의 길이 무엇인지 낯선 이방인은 우리들에게 말이 아닌 몸과 정신으로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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