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한다고 한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트윗으로 한국 등 잘사는 나라들의 WTO 개도국지위를 박탈해야한다는 얘기를 꺼낸 지 고작 90일 만에 일이다. 한국은 1995년 WTO 출범 당시 농업 분야에서 개도국 지위를 인정받았으나 개도국 지위 포기는 그동안 진행했던 그 어떤 FTA(자유무역협정)보다 파급력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이 미국의 강박에 굴복해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면 미국은 당연히 자국 농산물 추가 개방 압력을 가할 것이 뻔하다.
개도국 지위 포기로 가장 우려되는 건 농업 분야의 피해다. 한국은 FTA 등으로 농축수산물 관세장벽이 붕괴되고 있다. 그나마 개도국 지위를 이용해 쌀 등 주요 농산물을 특별품목으로 지정·보호해 왔다. 그러나 개도국 지위를 포기할 경우 외국산 수입쌀의 관세를 낮춰야 한다. 쌀값 등 농산물 가격 안정에 쓰이는 농업보조총액도 절반 정도 삭감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1조4900억원에서 8000억원으로 대폭 낮춰야 한다. 가뜩이나 어려운 한국 농업을 지킬 보루에 구멍이 뚫리는 셈이다.
우리나라 가구당 농업소득은 1995년 WTO 출범 이래 개도국 지위에도 불구하고 당시 연간 1,047만원에서 지난해 1,292만원으로 제자리걸음을 했다. 같은 기간 곡물자급률도 29.1%에서 21.7%로 떨어져 OECD 회원국 중 최저 수준일 정도로 농업과 식량자급이 위축됐다. 따라서 향후 개도국 지위 포기에 따라 그나마 농업 보호 및 지원책 가동이 위축되면 국내 농업은 고사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돌고 있다.
농민단체들은 정부의 WTO 개도국 지위 포기에 강력 반발하고 있다. 농산물 관세율과 농업 보조금이 차츰 낮아지고 그에 따라 국내 농업 분야가 타격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농민단체들은 정부의 결정이 ‘통상주권과 농업의 포기선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됐다”며 11월 농민대회와 내년 4월 총선을 통해 문재인 정권을 심판하겠다고 작심하고 있다. “트럼프 말 한마디에 농민의 운명을 팔아넘겼다”, “외교 통상분야의 국치일로 기록될 것” 등과 같은 격한 표현까지 써가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우리 농업은 WTO 개도국 지위를 받은 지 20년 이상 지났지만 여전히 정체상태에 있다. 도?농간 소득격차도 줄어들지 않았다. 이는 정부와 지자체가 농업 발전과 활성화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이런 마당에 개도국 지위가 포기되면 우리 농업이 미래는 더욱 막막해진다.
정부는 이번 사태로 인한 농업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급급할 게 아니다. 보다 절실한 것은 개도국 지위 포기를 극복할 전략적 대책을 내놓는 일이다. 막연한 청사진이나 비전만으로는 들끓는 여론을 잠재울 수 없다. 우리 농업의 현실을 냉철히 진단하고 장기적인 활성화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