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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현의 풍진세상> 재벌의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새해를 맞은 대한민국은 걱정 공화국이다. 벽두부터 가망 없는 정치, 무기력한 경제, 갈라진 사회에 대한 우려가 범람하고 있다.

가장 화급한 문제는 올해도 '일자리'다. 정년 60세가 시행되면서 청년 실업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전망이다. 대기업과 은행 등 금융권을 중심으로 작년 연말 명퇴 칼바람이 몰아쳤다. 중국 경제 하강, 미국의 금리 인상과 저유가에 따른 신흥국의 금융ㆍ재정 위기 등으로 세계 경제의 불투명성이 높아지면서 기업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부실기업 구조조정이 본격화하면서 고용 불안정이 가중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나라의 분위기는 급속히 4월 총선으로 쏠리고 있다. 정치권의 관심은 이미 입법이나 민생에서 표밭으로 이동했다. 말로는 경제를 위한다지만 진정성이 안 보인다.

총선이 여타 국정 의제들을 압도하면서 민생은 한동안 내팽개쳐질 가능성이 커졌다. 젊은이들이 아무리 일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아우성쳐도 대답 없는 메아리만 되돌아올 것이다. 정책 수단도 동났다. 작년엔 금융완화를 통해 빚(재정과 가계부채)으로 경제를 떠받쳤으나 올해는 미국이 금리를 올리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결국 기댈 곳은 경제 주체 가운데 그나마 곳간이 차있는 대기업밖에 없다. 10대 재벌의 사내 유보금은 2008년 20조 원대에서 현재 600조 원대로 불어났다. 이 가운데 현금과 단기금융상품을 모두 포함한 현금성 자산은 100조 원대라고 한다. 재계는 우리나라 대기업의 총자산 대비 현금성 자산 비중이 미국, 일본, 독일 등 G8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고 주장하지만 여유가 있는 건 사실이다.

국내 10대 재벌 기업은 우리 기업 전체의 총매출 가운데 25%, 순이익 중 42%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체 기업이 51만7천 개임을 감안하면 재벌 대기업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재벌들은 과거 정부의 보호와 국민의 지원을 업고 오늘의 입지를 다졌다. 환란에서 벗어난 2000년 이후엔 정부가 기업들의 수출 채산성을 맞춰주기 위한 환율 방어(원화가치의 인위적인 하락 유도)에 수십조 원을 퍼부었다. 원화 약세에서 비롯된 수입물가 상승의 부담은 국민이 고스란히 떠안았다.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걸맞게 재벌들이 미래 먹을거리를 찾아 과감한 투자와 고용에 나서야 한다. 문제는 세계 경제의 불투명성을 들어 대기업들이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기업가정신이 실종했다는 탄식이 들린다.

11년 전 작고한 경영학의 큰 스승 피터 드러커는 만년의 저작인 '다음사회(Next Society)'에서 기업가정신 세계 1위 국가로 주저 없이 한국을 지목했다. 그는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남한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오늘날 한국은 24개가량의 산업에서 세계 일류 수준이고, 조선과 몇몇 분야에서는 선두주자"라고 치켜세웠다. 20여년 전의 평가였다.

드러커가 칭찬한 기업들은 모두 허허벌판에서 맨주먹으로 부를 일군 창업세대의 성공 신화였다. 하지만 이들의 뒤를 이은 2세ㆍ3세 경영인들은 대부분 물려받은 재산 지키기에 급급할 뿐 새로운 영역에서 부를 창출하는 혁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유수의 재벌 총수들이 '안전빵'인 5년짜리 면세점을 먹겠다고 이전투구하는 행태는 민망했다. 땅에 10조 원, 주가관리에 11조 원을 넣는 보신경영도 미덥지 못했다. 세금을 적게 내고 자녀에게 기업을 물려주고자 세테크에 골몰하는 '좁쌀 경영인', '수신제가'를 제대로 하지 못해 추문에 휩싸인 재벌 총수는 국민을 맥빠지게 한다.

국민이 원하는 건 미국의 마크 저커버그나 빌 게이츠처럼 재산을 통째로 기부하라는 게 아니다. 청년들이 희망을 키울 일자리를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대기업들만이 새로운 사업을 선별해 자본과 인력을 투입하고 글로벌 마케팅을 펼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다. 일각에서는 재벌 위주의 산업 정책이 고용 없는 성장으로 한계에 달한 만큼 중소기업 육성 위주로 틀을 바꿔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쉽지 않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하청 구조여서 자생 능력에 한계가 있다

대기업들이 나서야 고용절벽 해소의 길이 열린다. 드러커는 "경영자들이 종업원을 마구잡이로 해고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막대한 소득을 올리는 것은 사회적, 도덕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고 질타했다. 새해에는 우리 대기업들이 사람을 자르는 손쉬운 구조조정 대신 일자리를 만드는 창조적 경영에 나서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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