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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효(醱酵)'의 미학


 

 

한국전쟁문학의 거봉 나림(那林) 이병주(李炳注)는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 과거가 햇빛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했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성숙되고 숙성되어 하나의 의미로 자리 잡는 데에는 그만한 시간과 공간의 얼개가 필요하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설익은 과일이나 음식이 몸에 좋지 않듯 졸속 처리된 정책이나 급조된 조직체는 자기 몸속 세포까지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처럼 스스로 탈을 일으키거나 갈등을 유발하는 독소(毒素)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숙성'이라는 낱말은 '발효'의 다른 이름일 터. 발효는 박테리아와 효모의 효소작용으로 화학적 분해가 일어나는 것을 말하지만, 역사적 맥락에서 상호적으로 '물들고 바래지는' 과정이 곧 '사회문화적 발효'의 메커니즘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음식문화에는 발효식품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된장, 고추장은 말할 것도 없고 곰삭은 젓갈은 '음식문화의 깊은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 한반도 지형에 맞는 햇빛과 달빛 그리고 바람의 흐름까지 내색하지 않고 견뎌낸 순간순간의 호흡들이 마침내 물고기 몸속 실핏줄까지 스며들고 '삭아서' '개미있는' 젓갈이 되는 것이다. 
우리네 시골집의 전통적인 흙담장은 또 어떠한가? 나쁜 기운을 쫓아낸다는 황토의 붉은 기운이 자갈돌 사이의 미세한 간극을 채워 어지간한 바람에도 끄떡없이 수많은 세월을 견뎌오지 않던가! 하지만, 70년대에 새마을을 가꾼다고 느닷없이 흙담장을 허물고 시멘트벽돌로 변신한 담장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볼썽사납게 푸석푸석 떨어져나가 담장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황토 흙은 숱한 세월동안 비바람과 풍상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숙성되고 발효된다는 사실을, 일시적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개발지상주의자들은 알지 못했으리라.  
우리말 문법에 모음변이 현상이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삭다'의 'ㅏ' 모음이 'ㅓ' 모음으로 변이되어 '썪다'가 되고, '낡다'의 'ㅏ' 모음이 'ㅡ' 모음으로 변이하여 '늙다'라는 어휘로 파생된다.  
이는 물론 언어학적인 변이현상이겠으나, 어휘란 그에 상응하는 사물의 본질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변이현상을 깊이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무릇 세상의 모든 것은 삭아서 썩고 낡아서 늙어진다. 사물이든 개인이든 국가든, 그러한 엄연한 과정의 총화(總和)가 곧 역사가 되는 것 아니던가.
 문제는 어설프게 삭거나 제대로 늙지 못한 경우일 것이다. 서울 남산에는 낙엽을 분해시키는 미생물 개체수가 환경오염 등으로 현저히 줄어들어 낙엽이 잘 썩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이순(耳順)의 나이를 훌쩍 넘기고도 지나치게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혀 어른답지 못한 행동을 보인다면 정신적으로 발효하지 못한 설익은 삶을 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자연생태계든 인간생태계든 썩음과 발효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점차 사라져가는 것 같아서 안타깝고 우려스럽다.  
이러한 우려는 자연의 개체나 인간 개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정당사(政黨史)는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국민을 위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앞세워 하루아침에 정당이 사라졌다 생기기를 반복해오는 까닭이 도대체 무얼까? 이 정당 저 정당 기웃거리며 거처를 옮겨 다니는 정치인을 철새에 비유하지만, 이 비유처럼 잘못 된 것도 없다.  

역사라고 일컫기도 민망한 우리나라 정치사적 지층(地層)에는 제대로 발효되지 못한 부끄러운 발자국들이 설익은 화석처럼 박혀 있다.
 한편, 지난해 11월 25일 개관한 아시아문화전당의 성과를 평가하기에는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그 이름에 걸맞게 아시아의 중추적인 문화허브로 작동하고 있는지는 다소 의문이다.
 지난 설 연휴 기간 어린이를 포함한 상당수 가족단위 관람객이 문화전당을 찾았다지만, 아직은 전체적으로 기대에 못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10여년에 걸쳐 총사업비 7,000억원이 투입된 거창한 하드웨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부족한 문화콘텐츠를 더욱 개발하고 숙성시켜 누구나 마음 편하게 '문화적 향취'를 즐길 수 있는 세계인의 문화쉼터로 자리잡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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