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想像, 그 어설픈 統制...



<화가 문지웅>

무언가 창조적인 일을 하는데 있어, 영감이 끼치는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미술이나 음악, 문학 같은 예술 활동뿐만 아니라 기술이나 산업 등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 말이다. 영감의 원천은 상상력에 있다. 다양하고 무한한 상상력이 우리 뇌에 저장되어 있다가, 필요한 어느 시점에 전광석화 같은 계시로 무언가의 느낌이 올 때 우리는 영감(靈感)이 떠올랐다는 말을 할 수 있을게다. 저장되어있던 상상력이 영감으로 화학적 변이를 하였다면 엉뚱한 상상일까?

영감의 실현에는 의지와 행동이 필요하고, 다양한 상상력의 저장, 정리, 조합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검열되지 않는 원초적 상상력의 보장에 있다. 이러한 원초적 상상력은 현실과 사회에 괴리되는, 또는 전혀 자연의 이치에 부합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그 엉뚱한 상상력을 정리하여 발휘된 영감을 실행함으로써 문명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만약에, 다양한 상상력을 단지 현실에 필요치 않다는 이유로 검열을 통해 제거를 꾀한다면 어떻게 될까?


‘유명한 판타지소설이나 공상과학영화 같은 것들을 어린학생들이 자주 접하면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할 수 있다’는 검증되지 않은 이론을 강의하고 전파하는 사람들이 있는가보다. 그런 강의를 들은 한 학생의 부모가 그 학생이 좋아하는 아주 유명한 판타지소설을 치워버려 읽지 못하게 하였고, 이에 대한 그 학생의 대응은 “자기는 기쁨도 없고, 앞으로 꿈도 꾸지 않을래요.”였다. 작년에 실제로 겪은 일이다. 외부의 충격에 아직 면역이 약한 어린학생들은 이렇게 교육적 충고(?)란 미명하에 자유로운 공상과 꿈이 검열을 당하게 되면, 나아가 상상 속으로의 자기경험을 부정하게 되고, 방어기제로써 스스로 현실이 요구하는 체계에 투항하게 된다. 교육현장에서 숱하게 겪는 일이다.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박탈된 상상은 현실에 순응하여 그 체계가 요구하는 하나의 인자로써 거짓 보장된 조그만 울타리에, 단지 그 체계가 허용하는 범위로써의 상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엔 그 어떠한 영감도 존재하지 못한다. 상상에서의 빛나던 상상력은 현실을 유지하고 생존하기위한 경쟁으로 인해, 늠름했던 모험은 되풀이되고 지루한 다람쥐 쳇바퀴 같은, 그러나 그거 밖에 없는 일상으로 대체된다. 여기서 영감은 쓰러진 폐가(廢家) 속 괘종시계의 뻐꾸기로 남아버린다. 시간 맞춰 불러보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미 잊혀진 채로 말이다.

이렇게 되면 현실체계는 연약한 상상에 대해 승리의 자축을 할 것이다. 이제 윗세대들이 닦아 놓은 그 길에 여전히 고군분투 하며 쳐지지도 말고 나서지도 말며 살아남기라는 응당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말로 저당 잡힌 인자들의 인생들을 보며 말이다. 지나친 비약일까?

통제된 상상, 박제된 영감, 오로지 현실에 살아남기 위해 질주하는, 그럼으로써 뒤쳐지지 않는 것만이,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행복을 담보하는 지름길이라고 믿는, 믿을 수밖에 없는 그런 체계라면 우리는 과연 정말로 행복할까?

편의에 의해서, 누구나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명제 하에, 상상을 통제하고 꿈을 길들이며 영감을 박제화 시킨다면 그것은 바로 파시스트들의 세상일 것이다. 이런 파시스트들의 천국이라는 곳은 현실을 빌미로 한 통제가 외부를 넘어 자아 스스로까지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곳, 그리하여 체계라는 불명확한 실체에 자기생존을 모두 맡기고 행복과 안전보장이라는 슬로건에 스스로 자위하는, 단지 가련한 인자들의 집합일 뿐인 것이다. 비극은 이렇게 마무리 된다.

그런데 그렇게 버릴 수밖에 없던 영감이, 상상력이 현실을 구하는 법이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이미 알고 있다. 아이러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진실을..... 상상은 함부로 통제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휘둘러 댈 수 있는 그런 이름이 아니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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