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문지웅>
북경에 다녀왔다. 38도에서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과 시간을 다투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미술대학들의 졸업 작품전과 화우 마커 화백(畵伯)의 전시, 다산쯔 798예술구 등은 꼭 가봐야 했고, 더불어 참여 작가들과의 대화는 감동과 더불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겨준, 충분한 사건이었다.
오늘날 중국 현대미술의 위상은 폭발적이다 못해 대세라 할 수 있겠다. 1990년대부터 리얼리즘을 필두로 서서히 세계무대에 오르던 중국 현대미술은 지금에 이르러서는 추상, 설치, 영상, 행위미술 등 이미 여러 방향에서 굳건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이다. 이미 여러 매체에서 중국 현대미술의 성공에 대한 논증은 차고 넘치지만 내가 체득한 몇 가지들은 꼭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첫째, 국가와 기관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력이다. 북경 중앙미술학원 본과 졸업 작품전의 오픈행사에 일종의 해프닝이 있었다. 본관 앞 넓은 잔디캠퍼스 전체마당을 모두 수박으로 깔아놓았다. 아예 수박 밭 자체를 통째로 옮겨 놓은 거다. 난 설치작품으로 보고 그 스케일에 놀라고 있었는데, 단지 주민들과 학생들에게 4년 동안 수고했다고 수박을 무료로 나눠주는 행사였던 것이다. 수박밭은 금세 텅텅 비게 되었고 수박 때문에 모여든 인파는 고스란히 졸업전시회에 유입되었으며 전시기간 내내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물론, 중앙미술학원의 졸업전시회가 단지 수박 해프닝 때문에 성황을 이룬 거라고 단정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르겠지만 기가 막힌 마케팅이라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관심 없는 사람들을 움직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 관심 없음을 이렇게 수박을 통해서 시선을 돌려놓은 참신한 기획은 치밀한 전략과 더불어 우리 시세로 일억에 가까운 돈을 투자할 수 있는 배짱과 이리저리 재지 않는 과감한 행동에 기인한 것일 거다. 나아가 현재 중국미술의 발전도 이러한 전략적 마케팅의 전적인 도움을 받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미술의 메카라 불리는 뉴욕에서도 중국의 현대미술 전시는 항상 성대했으며, 화랑가의 중심지 첼시에서는 중국작가들의 전시가 가장 요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여기까지 오는데 중국은 30년을 투자한 것이다.
둘째, ‘받아들일 수 있음’의 토대가 넓어짐과 창작 주체의 능동적 변화다. 알다시피 중국은 일당 사회주의 체제의 국가이다. 거기에다 미술은 오로지 당(黨)과 모택동을 위한 선전화(宣傳化) 아니면 고상한(?) 정신과 생활환경을 함양하기 위한 구상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 일색이었고 문화혁명 때에는 아예 선전화로만 명맥을 유지해왔다. 이러한 블랙코미디 같은 상황도 개방과 더불어 엄청난 변화를 겪어왔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1997년 여름 홍콩이 중국에 귀속될 때 상해에 처음 발을 들이고 중국을 오 간지 20년이 흐르는 사이에 참 많이 변했고 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많이 변할 거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낀다. 중국 유학을 결심하고 다소 늦은 나이에 98년부터 대학수업을 받을 때 처음에는 당혹감과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같은 주제, 같은 방법, 아직 남아있는 선전화의 영향, 서구에 대한 열등과 무시가 동시에 존재하는 모습 등이 나에겐 한없는 지루함이었는데, 한국에서 당시 유행했던 민중미술과 모더니즘의 싸움, 그리고 이거 아니면 인정하지 않던 전주지역 문화인들의 행태에 진저리가 쳐졌던 그 상황들이 여전히 오버랩 되어 그 때 당시 유학했던 대학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띠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들이 역전된 것은 소묘수업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인체소묘를 위한 해부학 실습에 실제로 인체해부를 해본 것이다. 그때 내 나이와 비슷한 젊은 강사가 수술용 장갑을 끼고 온몸의 근육과 장기를 들어 보이며 열강을 하던 모습은 내겐 쇼크였지만 한편으론 신성(神聖)한 경험이었다. 게다가 미숙하지만 말이 통하게 되면서 그들의 관점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섣부름과 편견이 창피할 따름이었다. “우리들의 작업이 아직은 경색되고 유치할 수 있음을 잘 안다. 우리의 지금까지 흘러간 역사가 오판이었고 비극이었으며 반성임을 잘 안다. 하지만 이 자체가 중국이다. 이것은 미화할 수도 없고 망각할 수도 없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미의식(美意識)에도 나타난다. 선 하나에도 우리의 고집이 있다. 그러나 그 고집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의 선이 좋다면 받아들일 것이고, 프로이드(Lucian Michael Freud,1922~2011)의 면이 좋다면 받아들일 것이며 워홀(Andy Warhol,1928~1987)의 색이 좋다면 받아들일 것이다. 이렇게 해도 중국이고 저렇게 해도 중국이다.” 그야말로 중체서용(中體西用)의 표본이 아닌가! 사실, 예술이라는 개념 안에서는 저 중국이라는 국가관도 별 무의미하겠지만 말이다. 한국의 80년대 90년대에도 민주사회에 대한 열망이 컸고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콜라는 미 제국주의의 산물이라 마시면 안 되고, 서양음악은 귀 버린다며 진짜 음악을 들어야한다는 어떤 국악 연구생도 만나보았고, 하다못해 80년대 이 지역에서 화단과 미술대학 입시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이름만 대면 알만한 미술학원원장이 자기의 소묘, 수채, 디자인 아니면 대학을 못 간다고 으름장을 놓던 그런 8,90년대도 분명히 있었다. 이건 내가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일이다.
이야기가 길어진다. 지면이 허락된다면 다음 편에 계속 이어서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