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웅 <화가>
뜻밖의 큰 선물 같은 긴 추석연휴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는 이 때, 이런 소릴 해야 하나 하는 부담감도 있지만 그래도 한 번 짚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글을 쓴다.
흔히 쓰는 속어에 “꼰대”와 “꼰대질”이란 말이 있다. “꼰대”라는 단어를 다음(Daum)의 사전에 따른다면 ‘기성세대와 선생을 뜻하는 은어’ 라 하고, “꼰대질”이라는 단어를 위키피디아(WikiPedia)의 사전에 따른다면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해서 남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을 속된말로 “꼰대질”이라 말한다.’라고 되어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꼰대와 꼰대질이라는 결코 좋지 않은 단어를 들고 나온 것은, 현재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시아 현대미술전 2017 ?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이라는 전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어떤 행위가, 심하게 말해 일종의 꼰대질로 보였기 때문이다.
20세기라고 하는 거대한 격랑 속에서 여성미술가들은 정치, 자본, 종교, 나아가 남성이라는 주류권력에 눌려왔던 여성 자신들을 대변하고 갈망하고 투쟁해왔다. 이러한 활동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개념 또한 확장되어 그동안 주류 페러다임 자체를 바꿔가고 있는 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럴 때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주최하는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전이 뜻하는 바는 매우 크다 할 수 있겠다. 이 전시가 관객들에게 타자화를 거부하고 여성 스스로 주체가 되어 바라보는 세계가 이렇게 직설적이고 강력하게, 주류가 그렇게 강요하듯 만들어 왔던 모랄의 세계와 다르게 인식되어진다면 이 전시 기획자에겐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 스스로의 시선으로 사회와 인간을 해부하고 표현하는 방법과 형식들은 주류 권력에 의해 강요된 듯한 시선과는 다르다. 이 다름이, 이 다름 들이 투명하고 깊은 울림을 주며 일종의 반성마저 들게 하였다면 내가 너무 나간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전시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성과 남성의 큰 차이점이 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미술에서도 남성과 여성작가들의 몸에 대한 관점과 표현들의 다름은 수많은 작품들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남성의 여성들을 바라 보는 시선이 어느 정도 소비성을 띈다는 것은 감히 사실이다. 지금까지 미술사에서 특히 여성의 몸들을 다룬 작품들은 여성을 성적 또는 모성의 대상화, 자기 결정권이 없는 수동적인 여성상이 대부분이었고, 이러한 종류의 작품들은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어 생산 중이다. 나는 여기에 선악의 가치를 논할 필요는 전혀 없다 생각한다. 하지만 그 작품들에서 느끼는 욕망들이 단순한 성적 소비나 주류들의 정형화된 윤리의 형태로 반복된다면 그 지루함의 미(美)들을 감당할 자신이 나에겐 없다.
아직도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데 정형화된 윤리적 시선이 작동하나 보다. 이번 전시에서 어느 공간을 칸막이로 가려놓고 “19금” 이라며 미성년에게는 전시를 보지 말 것을 부탁하는 행위를 보았다. 21세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획자의 결정인지, 상급기관인 도의 압력인지, 아니면 시민의 항의인지 알 수 없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작가들의 절실한 표현과 투명해지려는 노력과는 별도로 이 지역에서 여성의 몸은 “19금” 이라는 신성한 껍질을 씌운, 또는 칸막이로 가려서 경호해야 할 갚진 물건인가 보다.
주류의 시선과 다른 작품들은 “외설” 이라는 누명 아닌 누명을 쓰고 타자화된 채 여전히 골방에 감춰져있다. 자기의 도덕적 가치관이 세상의 전부인양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서 항의한 시민들의 요구에 의해 그랬다면, 아직은 이 지역에 이런 전시는 무리다 해서 친절하게 외설의 시선에서 보호해준 기획자나 공무원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훌륭한 “꼰대들”이고, 훌륭한 “꼰대질”을 한 것이다.
아직도 우리들의 몸들이 그렇게 감춰야 할 대상인가? 우리의 몸들은 아직도 포르노그래피의 대상들인가? 표현은 아직도 검열중인가? 주체가 된 여성의 몸은 가릴 필요가 없다. 그 자체가 삶이고 아름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