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웅 <화가>
오늘은 대입 수능시험의 날이다. 수험생들은 어떻게 보면 인생의 가장 청초한 꽃봉오리 같은 시기에 학교와 학원, 독서실 등에서 신체와 정신의 자유를 저당 잡혀가며 이 하루의 시험을 치루기 위해 매진해 왔을 것이다. 수험생들 각자의 시험결과는 차치하더라도 그 갸륵한 노고에 매우 애틋한 경의를 표한다.
굳이 애틋함이라 칭한 이유가 그 찬란한 청춘의 시간과 영혼과 열정들이 오로지 시험성적 하나에만 온통 투영(投影)된다는 데에 따른 어떤 안타까움, 씁쓸함, 일종의 분노에서 기인한 거라면 얼추 들어맞는다 할 수 있겠다. 물론 수험생 전부가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고 필자의 기우에 의한 과장된 상상이라면 그것 또한 어느 정도 타당할 것이다.
애틋한 마음에서 시험이 끝난 수험생들에게 권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억압된 신체를 해방시키는 일이다. 사람을 수동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드는 가장 전술적인 행위가 신체를 구속하는 일이다. 군대나 감옥, 병원 같은 일종의 수용시설들도 포함되겠지만, 예를 들어 ‘몇 시까지 등교해라’, ‘이걸 해라’, ‘저걸 하면 안 된다’ 등의 수직적 언어의 구속력에서 나의 양심이 정하는 최대한의 한도까지 신체에 자유를 주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자는 생명유지의 행위부터 운동이나 여행 같은 일정한 목적을 가진 신체 행위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이다.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 해방된 신체엔 새로운 에너지가 돌고 항상 약동하는 힘이 솟기 마련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 내 스스로가 내 신체를 해방 시키는 것이다. 해방의 자유가 타의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무의미 해진다. 때론 억압이 더 가중될 수도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시선의 방향을 바꿈에 있다. 우리는 새로운 인식을 갖으려 해도 기존의 고정 관념과 항상 부딪히기 마련이다. 수험생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공부에만 매달리지 않았겠지만 시험 준비기간 동안 새로운 인식을 가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두통이 있을 때, 늘 보던 것에서 벗어나 멀리 하늘을 보거나 녹색 풍경을 보면 어느 정도 효험이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는 것으로 안다.
이처럼 시선의 방향을 일부러 의도하지 않는 곳으로 인도하는 것은 새로운 인식의 발견에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입장에서 새로운 형상의 발견에 필자도 때론 도움을 받는다. 어떤 땐 아예 시선의 이동을 상상을 동원하는 데까지 움직여 본다. 건물을 볼 때 면이나 입체를 빼고 선만 본다든지, 아니면 건물의 형태를 무시하고 안의 내용을 상상해서 본다든지, 인체 모델을 그릴 때 이 모델이 6시간 후에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등등이 전혀 시각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감각을 총 동원해서 말이다. 이때엔 신체를 긴장 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떤 맥락의 도움 없이 아무런 사고의 영향 없이 오로지 시선만으로 상상을 동원하려면 자연히 신체는 긴장할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의 시선의 이동은 인식의 새로운 생성을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느끼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수험생들에게 이 두 가지 제안들이 좋은 경험에 이를 수 있다면 필자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다.
끝으로 성적이 예상보다 낮게 나와 좌절하는 수험생 에게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먼저 살아본 사람으로서 감히 덧붙입니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인생은 생각보다 아주 길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