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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다시 남도로(2)



박여범 <용북중학교 국어교사,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수필가>





아침 바람은 유난히도 차가웠다. 순천만의 바람은 만만하지 않았다. 두툼하지만, 모자가 없는 점퍼를 입고 행사에 참여한, 그곳에서 콧등이 벌겋게 달아오름은 어쩔 수 없었다. 올 해 들어 가장 추운 11월의 막바지, 순천만 문학관을 향한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물속을 누비는 수많은 철새들이 부러운 아침이었다.




빨라진 발의 보폭뿐만 아니라, 국어과 선생님들의 대화도 거의 없이 700여 미터의 순천만 문학관을 향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아마 모르긴 해도 -거짓말 조금 보태서- 100번은 읽어보았을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는 간절한 소망 앞에 ‘추위’ 따위의 환경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무진기행’은 1964년 10월 '사상계'에 발표된 김승옥 작가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급격하게 산업화되어 가는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지위를 성취한 한 인물의 귀향 풍경이 그려져 있다. 주인공 ‘나’는 ‘해방 후 무진 중학 출신 중에’서 ‘제일 출세’한 인물이다. 주인공은 고향 무진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낸다. 전쟁으로 인한 상처, 그 상처가 짙게 배인 고향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주체성과 창의성을 살리려던 열정을 회상한다. 그러다가 주인공의 성장기와 동일한 삶을 살아가는 여선생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주인공은 서둘러 상경할 것을 요구하는 아내의 전보를 받고 고향을 떠난다. 그러면서 고향을 잊고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무진기행'의 착상은 우연히 얻어진 것이었다. 어느 날 고향 거리를 우울하게 걷고 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중략) 또, 한 가지 우연히 얻은 소재는 어느 사사로운 모임에 갔더니 서울에 있는 모 음악대학을 나온 여선생님들이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유행가를 부르는 모습을 문득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을 다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중략) 당시는 대학을 나와도 취직자리 하나 변변찮던 암울했던 시대였다. 안개가 낀 듯이 미래가 보이지 않던 시대, 6.25전쟁으로 전통적인 재산도 가치도 다 파괴돼 버리고 너 나 없이 속물이 돼 버린, 속물이 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것 같아 보이지 않던 불투명한 시대가 바로 1960년대였고 젊은 날의 상황이었다. ……” '무진기행'을 쓰던 무렵' 중에서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김승옥 ‘무진기행’ 중에서)
 




 
‘무진기행’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안개’다. 특히, 작가는 ‘안개’를 통한 개인이 고향을 떠나는 과정을 통해 현대 문명은 개인의 기억과 환상에 억압적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현대인은 문명화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인의 창의성을 버릴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도 이번 세미나에서 감사한 것은 순천만문학관 ‘김승옥관’에서 김승옥 선생님의 얼굴을 직접 뵐 수 있었음이다. 작가의 얼굴을 생전에 뵙는다는 것도 일반 독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아님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정말 운이 좋게도 선생님을 직접 뵙고, 사진도 촬영하고, ‘김승옥관’을 둘러볼 수 있는 영광이 내게도 주어졌다. 뇌경색으로 약간 어눌하긴 하셨지만, 아직은 정정하신 김승옥 선생님이 너무나 감사했다.




문학을 꿈꾸며, 작품을 통해, 한 시절을 함께하고, 앞으로도 함께 할 미래에 선생님은 독자들과 늘 함께 할 것이다. 비록, ‘김승옥관’을 자주 찾아오지도, 선생님을 자주 만나 뵙지도 못하겠지만, 삶의 지표로, 문학의 잣대로, 글쓰기의 표본으로 선생님과 함께 호흡할 것이다.




행복하고, 행복한, ‘열여섯, 다시 남도로’ 중등 국어과 세미나에 함께 할 수 있어 가슴이 벅찬 시간들이었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잔잔한 그 감동의 여운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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