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우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러일전쟁 승리 이후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보호국화’라는 미명하에 대한제국의 국권을 본격적으로 침탈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을사조약 폐기와 매국노 처단을 주장하며 항일투쟁의 불길이 일어났다. 1906년 윤4월 13일(음력) 태인 무성서원에서 면암 최익현의 주도 하에 의병이 결성되어 10여 일간 항일 활동을 전개하다가 순창에서 전주·남원 진위대에 포위되자 동족끼리 서로 살상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자진 해산하였다.
당시 전북 진안 성수면 출신 25세의 습재(習齋) 최제학(崔濟學)은 최익현의 편지를 주요 인사들에게 전달하면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최익현은 의거(義擧)를 일으키기 위해 1905년 12월 노성(魯城) 궐리사(闕里祠) 유림 모임을 계획했다. 최익현이 광주 중흥동에 머물고 있던 유학자 송사 기우만에게 참여해 달라는 편지를 보낼 때 최제학이 심부름을 도왔다. 그 때 기우만 옆에 있던 고창 출신의 일광(一狂) 정시해(鄭時海)는 전하는 말을 듣자마자 기꺼이 의기투합하며 참여하였다. 궐리사 모임 이후 최제학은 정시해와 호남 곳곳을 돌아다니며 의병자금을 았다. 그 과정에서 갖은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 후 의병 부대가 순창에서 포위되었을 때 진위대의 총격에 그만 정시해는 순국하고 만다. 최제학은 붙잡혀 서울 남대문에 위치한 일본군사령부에 구금되었다. 최제학은 척추 아래 뼈 두 마디가 어린애 주먹만큼 뒤틀렸고 허벅지살이 모두 상처투성이로 살갗이라곤 없을 정도로 고문을 당하였다. 이러한 참혹한 감옥에서 순절한 정시해를 기억하며 다음과 같은 한시를 지었다. 최제학의 심정이 지금까지도 전해진 듯하다.
地分南北不相尋
我到松亭君適臨
雪風闕里同籌策
彈雨淳城共鏺鐔
詎忘倭寇世世恥
欲殲讎逆人人心
一俘一殉幽明隔
天地茫茫白日沉
땅이 남북으로 나뉘어 만나지 못했더니
내가 송정동 도착할 때 그대 마침 그 곳에 있었지
눈보라 치던 궐리사에서 함께 계책 세웠고
빗발치는 총탄 속 순창에서 같이 칼 들었지
어찌 왜놈이 대대토록 치욕임을 잊으리오
역적놈 섬멸하려는 건 사람이면 품는 마음일세
난 사로잡히고 그대 순절하여 삶과 죽음 달리하니
천지도 아스라이 흰 태양조차 어둑어둑하구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불확실한 미래와 성과주의에 매몰되어 온 국민의 심신이 지쳐있다. 불과 100여년 전 이 분들의 불꽃같이 치열했던 삶에서 용기를 얻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올해 1월에 최제학의 기록물인 '습재실기' 번역본이 출간된다고 한다. 그리고 최제학에 관한 학위논문도 나올 예정이다. 항일투쟁에 온 몸을 던져 불살랐던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뜻이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우리들의 관심과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과거의 인물을 진정 만나는 것이 결국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는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