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여범 <용북중학교 국어교사·문학박사·문학평론가·수필가>
학교 중앙 현관에 철퍼덕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아이들이 하나 둘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문득, 의문부호가 스쳐 지나간다. 저 맑고 깨끗한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너그럽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삶의 지혜가 충만하길 바라는 것도 욕심이 되어버린 시대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현실이 각박하고, 사는 것이 힘들다고 말이다. 이런 푸념 뒤에는 내 자신이, 우리 아이들이, ‘나’는 ‘나’ 대신에 ‘나’는 ‘너’를, ‘너’는 ‘너’ 대신에 ‘너’는 ‘나’의 입장이 되는 공동체의 진지한 대화가 필요해 보인다. 그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서로를 배려하는 학창시절은 쉬우면서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자신의 삶에만 집착하는 삶,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소모적인 추억이 삶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닌가 반문해 본다.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자신만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자신만의 편안함을 위한 시간표로는 행복한 오늘과 미래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너그럽게 살아내기는 정말 어렵다고 말이다. 세상은 각박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세상이 되었다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이타적이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겠다고 은근 슬쩍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
학교 현장에서도 이러한 시츄에이션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삶을 학습하여, 그대로 흉내 내기도 한다. 때에 따라서는 어른들보다 더 심화된 실천 학습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아이들 사이에서는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자연스러운 행동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아닌 ‘나’와 ‘너’라는 이분법적인 학교생활의 연장이다. ‘나는 나’, ‘너는 너’가 아닌 ‘나는 너’, ’너는 나’의 시대를 꿈꾸는 것은 나만의 욕심일까?
학교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려와 협조 그리고 나눔이 아닐까 한다. 다른 친구들을 위한 배려심은 자신의 인격 형성과 함께 단체 생활의 기본적인 출발점일 것이다. 이 출발점을 바탕으로 협조하고 나눈다면 진정한 성장을 가져오지 않을까 한다.
교사가 되고 보니, 선생님들이 학창시절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많은 가르침을 주셨는지 새삼 감사할 따름이다. 그 시절에는 너무나 힘이 들고 빨리 학창 시절이 지나가길 기도했건만, 아련한 추억 속에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그 시절 그 교정을 찾아가는 나들이 시간을 가지고 싶다. ‘나’와 그 시절의 친구들이 ‘너’가 하나 되어 만날 수는 없겠지만, 추억의 그 자리를 찾아가고 싶다. 그리고 기억에 남은 친구들의 이름을 만나고 싶다. 나만의 일방통행 희망사항이겠지만 말이다.
너그럽게 살기 위하여, 너그럽게 살기 위하여, 너그럽게 살기 위하여, 너그럽게 살기 위하여, 서로를 배려하고 용서하며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나’와 ‘너’가 되어주길 기도한다.
정말 아름답고 성장하는 마음으로, 감성으로, 인성으로,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아이들과 나였으면 좋겠다.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