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여범 <용북중학교 국어교사·문학박사·문학평론가·수필가>
학교 현장의 4월은 치열하다.
다양한 행사로 빠르게 지나간 시간이 야속하다. 선생님들은 적은 학습량에도 중간고사를 출제해야 한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평가 범위가 줄어들면 내심 환호성을 질러댄다. 그러나 요즘 교실에서는 교과 진도는 큰 문제가 아닌 듯하다.
다음 주가 평가 기간이다. 그런데도 아이들의 태연하다. 평가에 대한 강한 압박은 지난 세대에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들에게 깜지나 문제풀이, 나머지 공부 등등을 이야기해도 그저 피식 웃어 버린다.
시험이, 성적이, 인생의, 성공의 나아갈 길임이 아이들에게는 절실하지 않은 듯 보인다.
오히려, 조용하게, 마무 말없이, 책을 보고, 문제를 풀어내는 범생이 친구들이 가여워 보인다. 당연하게 여겨졌던 학구파가 교실의 주인이었던 보이지 않는 법칙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질서를 맞이한 듯하다.
학습에 관심이 없이, 공부와는 담을 쌓고, 자신의 개성과 꿈을 찾아 노력하는 아이들에게 ‘평가’라는 ‘부담 아닌 부담’은 덜어주어야 하는 것이 기성세대가 차려주어야 할 밥상이 아닐까 한다.
교문 담벼락에서부터 드리워선
저 시험의 그림자
아이들의 눈짓, 손짓에도 시험은 묻어 나오고
책상 서랍을 열면
서랍 속에서도 시험은 기어 나오고
떨어진 분필 한 조각 주워 들어도
시험은 아프게 손가락을 찔러오는데
아아 교정에 과꽃은
왜 저리 야속하게 피어나는가 (정영상 시인의 ‘시험’ 일부)
‘평가’ 없는 세상이 존재한다면, 아이들에게는 ‘행복의 낙원’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평가 없는 세상이 정답일까? ‘평가’가 없다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적절한 단계의 시험이나 평가는 경쟁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원만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기초가 아닐까 한다.
필기시험이 아닌 수행평가에서도 아이들의 성취도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개인차에 의한 성취도는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준비된 결과일 것이다. 우리는 그 최소한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전자제품도 미세한 차이를 보인다.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미세한 개인차가 발전이라는 디딤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평가’는 그 누구나 거쳐야 하는 단계를 힘들어할 수 있다. 그 어려움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볼 수 있다. 그 희망이 희망을, 또 다른 희망을 가져오듯이, 큰 부담을 갖지 말자.
희망으로 즐기면서 ‘평가’를 통과하다 보면, 우리들의 정신적인 성숙이 평가를 뛰어 넘는 날이 올 것이다.
‘평가’ 없는 세상에 살고 싶은 것은 모두의 소망이다. 학창시절의 ‘평가’는 그래도 부담이 적다. 자신의 노력만큼 정당하게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사회에 진출하면, 평가가 왜곡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디에 하소연할 때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럽더라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성숙’이라는 좋은 말이 그나마 위안이 될 뿐이다.
그래도 ‘평가’ 없는 세상에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