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여범 <용북중학교 국어교사·문학박사·문학평론가·수필가>
가을하면 대표적인 명절이 ‘추석’이다. 시골에서 자란 내게 ‘추석’에 대한 기억이 많다. 가을이 오면, 오곡백과가 풍성한 계절이기에 늘 먹을 것이 풍성하던 시기다. 산으로 들로 거닐던 아련한 추억이 가득하다. 그러면서 밤을 따거나 대추, 호두 등을 맛보며 천진난만한 시간들을 보냈다.
그럼에도 ‘추석’에 대한 기억이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어릴 적 아버지는 늘 명절이 되면, 큰 형님을 기다리셨다. 집안 청소를 깨끗하게 마무리하고, 이것저것 음식을 준비하고는 장남이신 큰 형님을 기다리셨다. 서울에서 생활하시던 큰 형님 내외가 우리 집을 찾는 가장 큰 손님 아닌 손님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큰 형님이 일찍 도착하신 경우다. 만약 그렇지 않고, 조금 늦어지면 대문 밖을 서성이며 큰 형님 내외를 기다리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어린 나의 시선으로는 명절도 별 것이 아니고, 큰 형님 내외가 고향을 찾는 것도 별 것이 아닌 듯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버지에게는 추석이 큰 명절이고, 기다리던 자식을 만날 수 있는 기다려지고 기다림을 저축하던 그런 날들이었던 것 같다.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버지의 이런 명절에 대한 준비와 자식 사랑은 보여주실 수 있는 사랑의 총체였음이다. 그때는 왜 그렇게 아버지의 명절에 대한 집착이 싫었는지 모른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을 나이가 되니 하늘나라에 계신다. 아버지의 잔소리와 짜증, 칭찬이 없던 훈육이 나중에서야 사랑이었음을 알게 됐다. 어떻게 자식과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 표현을 모르던 아버지가 이번 추석 유난하게도 그립다.
이번 추석에는 시간을 내서 ‘충북 옥천’에 모신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야겠다. 그리고 넋두리를 늘어놓고 싶다. 그 시절, 아버지를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 많이 나눠주시지 못한 자식에 대한 사랑도 듬뿍 받고 싶다. ‘아이들을 스스로 자란다’면서, ‘알아서 큼’을 강조하던 그 사랑을 마음에 담아오고 싶다.
고향 언저리에 추석과 가을에 대한 추억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 나는 행복하다. 그리운 친구들 얼굴이 떠오르고, 자식을 기다리며, 농사에 열중이시던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그려지는 그곳에 ‘가을 물감’을 색칠하고 싶다. 이 ‘가을 물감’이 더욱 풍성해질 때, 나는 고향과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에 대한 풍성한 추억들을 정리할 것 같다.
가을과 추석에도 별다른 추억 없이, 하루하루 살아내기 위한 사람들이 있다. 이 가을의 풍성함이 그들에게도 무엇인가 여유로움과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연휴이길 소망해본다. 추억은 만들어가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환경도, 가치도 자신이 수용태도에 따라 달라진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함께하는 가을과 추석이길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는 명절이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