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희의 소설 혼불의 무대는 남원 사매면 노봉마을 삭녕 최씨 집안이다. 삭녕 최씨 집안이 주도적으로 건립하고 운영했던 노봉서원은 현재 주춧돌만 남아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으로 노봉서원이 철폐된 것이다.
서원철폐령은 유림의 엄청난 저항을 불러 일으켰지만, 대원군의 강력한 추진 의지로 마침내 1868년(고종 5년)에는 미사액서원, 사우(祠宇)를 대상으로 철폐시키고, 1871년(고종 8년)에는 사액서원, 사우를 철폐시키면서 전국적으로는 47개소만 남겨두고 정리했다. 사액서원이란 국가 차원에서 공인받아 임금이 편액을 하사하고 재정적으로 도움을 받는 서원을 말한다. 서원철폐령으로 2백년 이상 운영됐던 노봉서원은 전혀 예상치 못한 채 철폐를 당한 것이다.
흔히 서원이 철폐되면 배향된 선현(先賢)에게 아뢰는 의식을 치르고, 재실과 강당 기타 부속건물을 철거하며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을 허물고 위패를 땅에 묻는다. 그때 나오는 건물의 기와와 목재 등은 재활용했는데 통상 관아에서는 옮겨 놓았다가 관아나 향교 건물 수리할 때 활용됐다.
노봉서원은 남원의 삭녕 최씨 집안이 해주오씨 집안과 연대해 건립된 서원이다. 1649년(인조 27년)에 건립하고 홍순복, 최상중, 오정길, 최온, 최휘지를 배향했다. 그 후 1697년(숙종 23년)에 사액서원이 됐다.
홍순복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변론하다가 죽음을 당한 선비로 이른바 기묘명현이다. 홍순복은 남원 사람 김당의 딸과 혼인해 두 아들을 낳고 남원에 거주했다고 하는데, 두 아들에게 후손이 없고 몇 명의 외손 역시 다른 곳으로 흩어져 살게 됐다.
때문에 노봉서원 건립 이후 홍순복 후손이나 외손 측에서는 아무런 참여를 하지 못했다. 오정길은 해주오씨이고 최상중, 최온, 최휘지는 물론 모두 삭녕 최씨이다. 즉 노봉서원에는 다섯 명이 배향됐지만 후손이 없는 홍순복을 제외하면 삭녕최씨 3명, 해주오씨 1명이다. 비율로 따지면 3대1이다.
그럼 철폐 이후 남겨진 노봉서원 재산을 어떻게 처리됐는가 하는 궁금증이 남는다. 이에 대한 자료는 무슨 이유이지 모르지만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노봉서원은 관련 고문서가 2점 남아있다.
노봉서원은 1871년 서원 철폐령 이듬해 1872년 11월 18일에 삭녕 최씨와 해주 오씨 문중에서 서원 소유 토지를 분배했다. 21일에는 여타 재산을 나눠 갖고 합의문을 작성했다. 그런데 실제 삭녕 최씨 집안과 해주 오씨 집안 간에 노봉서원 재산을 3대1의 원칙에 따라 나눴다. 토지의 경우 4등분을 하고 면적과 가격 합계를 적었으며, 동일지역 논들을 뒤섞어 분배했다.
이는 삭녕 최씨와 해주 오씨의 몫이 구체적으로 지정되지 않고 무작위 추출 방식으로 각 몫을 확정해 균등하게 분배해 공정성을 담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여타 기물의 경우에도 3대1 비율 방식을 원칙으로 하면서도 몫을 나눴다.
서원 철폐령 이후 양측 집안에서는 1년 동안 노봉서원 소유 전체 논에 대해 일일이 값을 매기고 때론 조정하는 등 협의 과정을 지속적으로 거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애당초 노봉서원같이 문중이 주도해 건립한 서원은 향촌사회에서 친족결속과 사대부로서의 위상 강화가 건립 목적이다. 그 기반에는 호혜적 교환을 통한 상호 공동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서원 건립 과정, 관리경영, 특히 서원철폐령 이후 서원 재산 처리에서 그 관계를 극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노봉서원의 문서 2점은 우리들에게 옛 사람들에 대해 많은 사실을 알려주는 소중한 전북의 자랑스러운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