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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논둑



박기춘  <농촌진흥청 유기농업과 농업연구관>


논둑이 사라지고 있다. 물론 물리적으로 논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논둑을 맨발로 다니거나, 논둑을 지나다니는 개구리, 두꺼비, 뱀 등을 보거나, 논둑에 앉아 새참을 먹어본 사람들이 기억하는 논둑은 점점 찾기가 힘들어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논둑은 없어지고 있다.
 
논과 밭 상태의 중간지대이자 야생지과 농경지의 중간지대인 논둑은 밭이 부족해 식량을 충분히 생산할 수 없었던 시절에는 콩을 공급하는 텃밭이었다. 논둑은 물이 풍부해서 콩이 가뭄을 겪지 않고, 한 쪽에는 벼가 없이 비어있어서 햇빛도 충분히 받기 때문에 콩의 수량이 많았다. 

식량 공급이 부족한 시설, 한 알의 먹거리를 더 생산하기 위해 농부들은 이곳에 메주콩이나 강낭콩을 심어서 밥밑콩이나 메주의 원료를 생산했다. 반 야생의 논둑은 경사가 심하거나 높을수록 면적이 넓고 자라는 풀이 많아서, 농가마다 한두 마리 키우던 소의 먹이를 제공하였다. 바쁜 농사시절에도 비가 와서 농부에게 시간이 나거나 아침 이른 시간에 농부들은 잠깐 동안 낫으로 논둑 풀을 베어서 지게 한가득 풀을 지고 돌아오곤 했다. 

모내기를 손으로 하던 시절에는 농사꾼들의 휴식처도 됐다. 농사꾼들에게 논둑은 허리 굽혀 일하다가 잠시 앉아서 쉴 수 있는 장소였다. 논 밖 멀리 넓은 곳까지 나오기는 어렵기 때문에, 잠시 쉬려고 할 때 엉덩이를 걸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했던 것이다. 

또는 일하다가 새참을 먹을 때 안주인이 머리에 이고 온 국수 한 그릇을 먹으며 농부들이 피곤한 몸을 잠시 쉬게 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이웃과 정담을 나누거나 새참을 함께 먹던 사랑방이기도 했다. 물론 모내기 전에 논둑에서 물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고 논둑 안쪽을 손으로 진흙을 바르는 일은 농부의 허리를 휘어지게 했고, 장마 비로 무너진 논둑은 농부에게 비를 맨몸으로 맞으며 무너진 둑을 다시 쌓게 했던 가혹한 노동의 대상이기도 했다.
 
논둑이 사람에게만 쉼터를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풀이 많이 자라는 논둑은 메뚜기, 개구리 등의 야생동물의 휴식처가 됐다. 물속에서 놀던 개구리가 논둑에 올라와서 휴식을 취하고, 뱀이 풀숲에 숨어서 먹이를 기다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우리 눈으로는 쉽게 보지 못하지만, 많은 벌레와 미생물들이 살고 있다는 것은 가을에 논둑을 태워서 병해충을 없앤다는 농사 행위로도 알 수 있다. 물론 논둑 태우기가 실제 병해충을 억제하는데 도움이 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벌레와 미생물 대부분은 작물에 해를 끼치는 병해충이 아닌데, 논둑 소각은 해충뿐만 아니라 익충이나 미생물까지 모두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다랑논의 논둑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관광자원으로 각광을 받고 있기도 하지만, 이제 논둑은 있으되, 논둑이 하던 역할 즉, 목초지, 휴양지, 휴식처, 텃밭 등의 역할을 하지는 못하고 있다. 흙 대신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논둑에서는 개구리가 살 수 없고, 손으로 모내기를 하지 않으니 논둑에서 쉴 일도 없으며, 일손 부족으로 논둑에 콩을 심지도 못하고, 제초제로 풀이 말라 들어간 논둑에는 곤충 등의 생물들이 살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유기농 방식으로 벼를 재배하는 논의 논둑 풀은 제초기로 깎는다. 이런 논둑에는 메뚜기, 거미, 두꺼비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숱한 생명들이 돌아오고 있다. 논둑이 무생물의 흙덩어리가 아니라 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는 논둑으로 남는데 유기농이 기여하고 있다. 유기농이 사라져가는 논둑을 다시 돌아오게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일을 유기농 생산자와 소비자가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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