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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통감(古今通鑑)



김건우  <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전북 순창군 강천산(剛泉山)에 가면 골짜기와 폭포의 경관이 참으로 아름답다. 강천산을 가는 도중에 강천사(剛泉寺)이라는 절이 있고 그 건너편에 삼인대(三印臺)라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유적지가 있다.

삼인대는 지방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됐고 1994년 순창 지역민과 후손들에 의해 삼인문화선양회가 구성돼 1995년부터 매년 8월 삼인대문화제를 이곳에서 개최하고 있다. 순창군에서는 충절과 효의 정신을 기리고 순창 정신문화의 상징으로 삼기위해 최근에는 삼인문화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삼인은 3개의 관인(官印)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중종 때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무안현감 유옥(柳沃)이 만나 각자 관인(官印)을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맹세하면서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했기에 그 곳을 ‘삼인대(三印臺)’라고 불렸던 것이다.
 
그들은 신비(愼妃)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신비는 중종의 첫 번째 왕비이다. 그의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은 연산군의 처남이었다. 중종반정을 주도한 박원종의 회유를 신수근은 거부하자 살해당했다. 그리고 중종의 아내인 그의 딸은 후환을 두려워한 반정세력들에 의해 강제로 폐출됐다. 

그 후 중종은 장경왕후(章敬王后)와 혼인했고, 장경왕후는 훗날 인종이 되는 아들을 낳고 산후병으로 죽고 말았다. 천재지변도 잇따르자 중종은 1514년 좋은 의견을 구하는 전교를 내렸는데 이때 목숨을 걸고 박상과 김정이 신비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유옥의 경우 강천산 모임에 참여했지만, 신비 복위 상소에 이름이 기재되지 않아 삼인대의 삼현(三賢)에 대해 논란이 있기도 했다. 유옥이 아니라 박상의 아우 박우(朴祐)나 하서 김인후라는 설도 있었다. 하지만 삼인대 비문 등으로 보면 유옥이라고 여겨진다.
 
박상과 김정이 아뢴 상소 내용은 무척이나 중종에게 곤욕스러운 사안이었다. 또한 어찌 보면 실정과 전혀 동떨어진 주장이기도 한 내용이다. 당장 사간원과 사헌부 등은 종묘사직에 관련된 사안으로 죄를 줄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정광필(鄭光弼) 등이 힘써 변호한 결과 10월 24일에 박상을 남평현, 김정을 보은현으로 유배를 보냈다. 유배지는 각자 고향 근처이고 다음해 11월 13일에 박상과 김정은 다시 조정에 서용됐다.
 
2백여 년이 흐른 뒤 1739년(영조15)에 드디어 신비가 복위돼 단경왕후(端敬王后)로 복위시키는 전교를 반포했다. 그 후 1799년(정조23) 7월 17일 정조는 박상에 대한 제문을 내리면서 ‘세 관인이 걸렸던 석대, 만고토록 닳지 않으리라.[三印其臺 萬古不?]’라고 칭송했다. 이 말은 삼인대 위상과 관련된 대표적인 구절이다. 아무튼 그분들의 주장이 결국 2백년이 더 지난 후에 드디어 빛을 보았던 것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이든지 결국에는 정의롭고 바른 길로 되돌아간다는 뜻이다. 삼인대 상소는 조선시대 역사에서 중종반정 이후 훈척에 대항해 사림을 정치적으로 결집시키고 동시에 호남의 유학자들이 실천적 성격을 보여주는 의거(義擧)였다. 권력을 휘두르는 훈척 세력들에게 용감하게 맞서고 목숨을 걸었던 세 분의 일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보이는 현상들에 대해 일희일비하면서 정작 본질을 잃고 마는 분위기에 대해 냉철하게 바라보는 높은 안목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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