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여범 <용북중학교 국어교사·문학박사·문학평론가·수필가>
캐나다 감리교회 해외 선교부가 올리버를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두 아이가 성홍렬에 걸려 집에 격리된다. 주변에서는 하나님의 뜻이라며 파송에 대해 고민해 볼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그의 아내 제니는 “아마, 한국 땅에서 당신이 꼭 필요한가 봐요. 당신은 거기에서 큰일을 할 거예요.”(위의 책, 77쪽)라는 말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
1893년 7월 16일, 일요일 오후 마침내 한국 땅에 발을 내딛는다. 그러나 “소식도 없이 어떻게 갑자기 오셨습니까?” “지금 서울에는 선교사들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참으로 난감했다. 다행스럽게도 베어드 목사의 서재에서 한 동안 기숙하여, 서울로 올라갈 날을 위해 기도했다. 8월말에 제물포행 배에 몸을 오른다. 그리고 그 배에서 미국인 전권 공사인 알렌을 만난다. 갑신정변의 회오리 속에서 알렌은 핏줄을 봉합하는 수술을 성공한다. 이후 고종의 시의로 임명되고 소문이 소문을 불러 고종은 알렌의 소원인 병원을 만들어 준다. 그 병원이 ‘중생을 구하는 집’이라는 의미를 지닌 ‘제중원’이다. 1885년 4월 10일 개원한 이 병원의 영어식 명칭은 ‘왕실병원’이다. 이런 알렌과의 대화는 언더우드의 호의로 이어져 서울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아내 제니가 서울에 도착하자 병들어 힘든 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언더우드는 올리버 에비슨을 고종의 방에 인도한다. 그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얼굴과 두피가 심하게 부어 있는 왕을 보고 놀란다. “하나님 지혜를 주세요.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중략)- “그렇다면 왕에게 옻이 올랐을까? 무슨 연유로?”(위의 책, 101쪽.) 에비슨은 병원에서 물약을 가져와 얼굴과 머리에 바른다. 신참 의사인 에비슨의 명성은 단 한 번의 진료로 확고부동해진다.
11월 1일 자로 왕립병원인 제중원 의사로 일을 하게 된다. 당시 한국 사람들은 의사를 중인 계급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미국에서 의료인을 보내주는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과목씩이라도 가르치겠다는 목표로 학생을 모집하기 시작한다. “혹시 의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과 무슨 일을 하는 지에 대한 설명에 그들의 표정은 난감해졌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선교부에서 의학교 설립을 반대한 것이다. 병원마다 환자가 넘치고 의사는 부족하다는 이유다. 이에 절충안으로 병원마다 학생 조수를 두는 제도를 허용한다. 학생들은 모집이 됐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최고 학년의 일곱 명의 학생은 매우 우수했다. 에비슨은 모든 제자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몇몇 제자에 대해서는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안과와 이비인후과의 권위자 홍석후가 대표적이다.
에비슨 가족은 건강 안식년을 얻어 캐나다로 돌아갔다. 에비슨은 서울 선교부에서 온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된다. 그 편지에는 한국에 현대식 병원을 건립할 수 있도록 1만 달러의 모금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하여 에비슨은 “그렇습니다. 한국에는 현대식 병원이 없습니다. 반드시 제대로 된 병원이 있어야 합니다.”(위의 책, 161쪽.)라는 대답으로 한국에서의 병원 건립 타당성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 결과, 현대식 병원을 짓기 위해 에비슨 박사에게 1만 달러의 모금을 허락한다. 캐나다에 온 지도 1년이 지났다. 한국으로 돌아갈 채비 중 선교부 엘린 우드 박사의 전화를 받는다. 마침 뉴욕 카네기 홀에서 4월 하순부터 5월 초순까지 만국 선교대회가 열리는데, 귀국일정을 연기해 달라는 내용이다. 시간이 흘러 행사는 시작되었다. “그 때 누군가 에비슨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중략)- 세브란스 씨, 에비슨 박사를 소개합니다.”(위의 책, 166쪽.) 선교부 로비에서 만났던 젊은이의 이름과 같은 이름이었다.
루이스 에지 세브란스, 1839년 생으로 클리브랜드 최초의 의사였던 데이비드 롱 박사의 손자였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으며, 장로교회의 장로로 평생토록 기부를 했다. "세브란스 장로님, 훌륭한 선물에 감사드립니다. 한국에 있는 병든 사람들에게 큰 혜택이 될 것입니다." -(중략)- “받는 당신 보다 주는 내가 더 행복합니다. -(중략)- 그런데 그 곳이 바로 서울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결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나를 인도해서 이 일을 이루신다고 믿습니다.”(위의 책, 171쪽.)
1900년 가을 에비슨 가족은 서울로 돌아왔다. 병원을 지으려면 부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병원 부지를 고종 임금이 제공하고 싶다는 소식이 당도했다. 그러나 일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서울 선교부 회원들은 연서를 작성하여 뉴욕 선교부에 항의의 편지를 보내고, 복사본을 세브란스 씨에게 알리자, 항의하기에 이른다. 이런 저런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병원 건립 작업은 계속됐다.
1904년 9월 23일 오후 5시, 경성역 맞은 편, 멋진 건물이 완성됐다. 병원 건물을 바라보는 에비슨은 감격스러웠다. 병들고 연약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의 문이 세상을 향해 열려진 것이다. 아내 제니의 눈에서도 에비슨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 후에도 세브란스 병원은 계속 확장됐다. 많은 어려움이 수반되는 중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의료 선교사로서의 역할도 충실하게 담당했다.
한국 땅에서 40년 이상 헌신하고 에비슨과 제니는 캐나다로 돌아갔다. 제니의 형제도 10명이나 됐다. 그동안 만나지 못한 형제들과 자식이나 친지 빕을 방문하며 마지막 인생을 즐기고 싶었다. 에비슨이 초등학교 선생을 하던 학교도 방문한다. 그런데 제니가 언더우드 집에서 갑자기 병들어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한국을 떠나면서 제니 한 사람을 의지했는데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
그는 절망과 고독 속에서 다시 일어나 한국에서의 42년을 글로 남기기 위해 기록한 회고록을 집필하게 된다. 이러한 에비슨의 기록이 없었다면 세브란스와 연희 전문학교의 기록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96세의 일기로 사랑하는 아내 제니의 옆에 안장됐다. 한국 땅에서 에비슨으로 하여금 의술과 선교사의 사명을 다하게 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소설 형식으로 쓰여진 민혜숙 작가의 ‘세브란스 이야기’-올리버 알 에비슨과 세브란스-(케포이북스, 2018)는 한국을 위해 의료선교로 헌신하면서 기부천사 세브란스와의 협력해 세브린스 병원을 세우신 분의 이야기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올리버 알 에비슨과 제니의 희생, 그리고 세브란스의 기부를 통해 하나님과 평생을 동행하신 그들의 헌신적인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자.
세브란스 씨의 기부에 의한 한국 땅에 세워진 최초의 병원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독 문화와 서양의 기부문화가 만들어 낸 선물이다. 이제는 경제 발전을 통한 세계 중심에 우뚝 선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를 향해 손을 내밀고 그들과 함께 기쁨으로 한 알의 밀알이 돼야 할 것이다. 내가 손을 내밀어 누군가이 손을 잡아주는 통 큰 배려하와 조금은 ‘손해 보며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하나님과 함께 선교의 사역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작가 민혜숙은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동대학원 석사, 박사로 대원여고와 외고에서 불어 교사를 역임했다. 광주 이주 후, 전남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다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남대학교와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현재는 호남신학대학교 조교수와 용북중학교 교목(校牧)으로 재직 중이다. 또한, 1994년 '문학사상'중편소설에 당선돼 소설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 소설로는 '서울대 시지푸스', '황강 가는 길', '돌아온 배', '목욕하는 남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