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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생물(生物)인가?



이경로  <본지 논설위원 전,금산고등학교 교사 반태산작은도서관장>



우리나라의 진정한 민주주의 시대는 6월 항쟁 이후로 평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미군정시절의 민주주의는 계엄 시대를 방불케 하는 미 군정 산하의 정치체제였기 때문에 무늬만 민주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 시대의 민주주의를 빙자한 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4·19혁명을 통한 반짝 민주주의가 싹을 틔웠으나 박정희 군부에 의해 무너지면서 30여 년을 군부독재의 정권이 우리 사회를 통치했다.

 그야말로 무늬만 민주주의라는 명칭을 달고 특정한 사람과 집단들이 독재자를 옹위하면서 우리 사회를 공포 속에 억압했고 경제발전이라는 허울 속에 교묘하게 정치적 상관관계를 이용해 민주주의라는 사회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권리를 가지지 못하는 사회가 불과 몇십 년 전의 우리나라 현실이었다.

 사실, 이러한 현실적인 사회현상의 최정점에는 바로 정치적인 산물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위정자라는 본류 아래 기생하면서 그들을 옹위하고 눈과 귀를 가리면서 자신의 영달을 득했던 사람들 역시 정치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군부독재가 무너지고 진정한 민주주의로 일취월장하면서 우리 사회는 참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그동안 정치라는 구조하에서는 여와 야라는 표현의 정당들이 대립하면서 우리 사회의 붕당정치가 과거 조선 시대의 당쟁을 넘어서는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정적인 것은 특정 정당의 최고위 인물이 대통령이 되면서 여야가 한 번씩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조선 시대의 당쟁은 임금이 당색에 따라 제위 기간에 특정 정파를 몰락시켰다가 다시 등용했다가를 반복하면서 왕권 강화에 몰두했고 이러한 와중에 실력 있는 수많은 사람이 반대 당파에 의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들이 참 많았다.

 그렇지만 현대는 왕이 군림하는 시대가 아니라 아예 당색이 같은 동일 이념을 가진 인물 중에서 대통령이 배출하게 돼 정치적인 정책과 인물 등용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된다. 반대로 야당의 처지에서는 친여 정당을 빼고는 이유를 불문하고 깎아내리고 불신하고 협조를 하지 않는다. 국민을 생각한다고 하면서 기본적인 정쟁에 관해서만 협조가 아닌 협의를 하고 국가의 정책이나 대외 관련에 관한 사항은 대부분 반대의 관점을 내세운다.

 우리는 정치는 생물(生物)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생물이라는 것은 살아 있다는 표현으로 언제 어디서든지 살아 움직이는 정책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국회의원 등 국가의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에 따라 정책이 변동돼 처음 주장했던 것이 다르게 될 때 ‘정치는 생물이다’라고 너스레를 떤다.

 일관성 있는 정책이 아닌 가변성 있는 정책으로 변신해 국민을 호도하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재미있는 것은 여야가 공수교대하면 그동안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보여주기식 청문회에서 비판적 대상의 관점에서 바로 긍정적이고 방어적인 입장으로 변하고 다른 한편은 이와 정반대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바로 정치는 생물이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나라만큼 정치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국민 생활에 밀접한 관련을 갖게 하는 것은 매우 대단한 일이다. 국회 상임위 과정에서 일개 한 사람의 국회의원 의견이 전체 상임위 법률 통과에 제동을 걸고 자신의 뜻을 관철해 관련법을 이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5.18 진상규명에 관한 법으로 자유한국당 이종명 의원이 북한군 개입에 관한 문구를 삽입해야 한다고 주장해 결국은 해당 문구가 관련 법률에 삽입돼 지난번 국회에서 있었던 지만원 씨 초청 5.18 관련 강연회가 문제가 됐다.
 
이 역시 정치는 생물(生物)이 아닌가? 결국, 정치는 살아 있다는 것이다. 정치는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살아 있는 생물로 변화무쌍하면서도 어느 날 참과 거짓이 교차하여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 바로 정치는 생물일 수 있다. 이 말의 어원을 한편으로 보면 원래 의미는 정치의 현상적 역동성을 표현한 말이다.

 좀 더 세분화하면 생물이라고 규정한 것은 ‘살아 있는 것은 그 의지와 상황에 따라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속성이므로 함부로 예견할 수 없다’라는 것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 본질적 표현이다. 우리의 생물학적인 정치의 표현은 대부분 일본의 영향이 지배적이다. 서구 민주주의의 영향을 형식만 받았지 내용은 일본식 운영이 대표적이고 이를 따라잡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도마다 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 정치의 본질이 됐었다.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를 하고 이를 또 저지하면서 생겼던 수많은 갈등과 대립은 여야가 바뀌면 고스란히 상대진영의 논리에 따라 바뀌곤 하면서 예측 불허의 생물 상태가 돼 예견될 수 없는 것이 된다. 지금 정치의 전당이면서 민주주의 꽃을 피우는 국회(의회)는 상시 국회가 아니라 여야합의로 열리는 비상설 국회다. 정기국회만 법으로 지정돼 있을 뿐 이전의 국회 개원은 여야합의가 아니면 매우 어렵다. 지방의회 정치인들 역시 국회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국민은 국회의원들을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선거 때만 되면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선거운동을 하고 그들에게 투표한다. 그리고 전체를 싸잡아 국회의원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이들의 행태를 비난한다. 그렇지만 국회의원들은 제도적인 민주주의의 대의로 선정돼 이를 잘못 선택한 국민에게도 매우 책임이 크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불과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지역적인 정당의 선출 구조가 확연히 구분돼 전라도와 경상도의 처지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하면서 언론에서는 이를 부추기기도 했다. 작은 한반도에서 남북이 아닌 동서 간의 지역적인 정책과 의견이 달라 동일국가의 구성원 간에 문제의식을 느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정치는 생물(生物)이라는 것인가? 바라옵건대 생물은 표현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정치는 살게 하려면 바탕의 근원인 국리민복(國利民福)이 아닌가? 제발 당리당략에서 벗어나 신뢰받는 생물의 정치가 돼 대한민국 국민을 세계 속에 일등국민으로 우뚝 솟게 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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