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온갖 미사어구를 오버하는 표현으로 상대방은 물론 주변을 힘들게 하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된다. 직업이 교사이다 보니, 내가 만날 수 있는 이러한 사례는 주로 학생이 많다. 그러나 때로는 교직원, 학부모, 업자와의 갈등으로 힘겨운 시간이 있다. 이럴 때마다 서로 다른 방법으로 갈등을 최소화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쌈닭’이란 별명을 자랑스러워하던 지인이 이 글을 쓰는 지금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 ‘쌈닭’과 절친으로 지내왔던 나 역시, ‘쌈닭’이었다. 마음으로는 ‘그만, 멈추자. 멈춰야 해’ 라고 외치지만 결국은 사건의 현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 이력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와 비슷한 상황이 전개된다면, 아마도 나는 다시 ‘쌈닭’이 될 것이다. 그 차이는 이런 것이다. 무턱대고 앞만 바라보며 달려갔던 어린 ‘쌈닭’이 이제는 주변을 살피며, 밀당을 할 줄 아는 ‘지성인이라는 선수’가 됐다는 것이다.
가끔 쉬는 시간이나 수업이 없는 짬을 이용해서 학교 주변을 눈에 담다 보면, 다양한 새들과 이웃집 닭들이 학교 울타리를 넘어 먹거리를 찾고 있는 그들 가족을 만날 수 있다. 신기한 것은 아직도 해답을 모르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그 가족들을 통해 만날 수 있다는 커다란 행복이다. 모이를 찾아 이곳저곳을 발로 파헤치며 곤충 잡기에 열중인 그들이 수돗가에서 물을 마실 때는 가만히 다가가 앉아서 그들을 바라본다.
어미 닭과 병아리가 물 한 모금 마시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물 한 모금 마시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하는 반복적인 행동을 인간적으로 해석하는 자의적인 시간이 된다. ‘아, 물을 마시고 하늘을 향해 감사함을, 귀한 물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를 하는 것이구나?’ 하는 동화적인 상상력에 근접하곤 한다. 정말 저 닭과 병아리가 무엇을 위해 하늘을 쳐다보는지? 왜, 반복적으로 그 행위를 지속하는지? 내가 병아리라도 저렇게 할까? 등 다양한 엉뚱함으로 미소 짓게 하는 소중한 만남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다시 이웃집 닭 가족을 만났다. 그 순간, 스쳐 가는 교훈이 있었다. ‘아, 그게 정답이었구나? 아, 그래, 그거였어? 왜, 그걸 몰랐지?’ 라는 그동안의 의문점이 나만의 해석으로 행복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단순하게 얻은 인생의 가치이자 가야 할 길이 됐다. “고맙다. 너그들이 아니었으면, 난 오늘도 또 정신없이 목표도 없이 시간과 일에 지배당하는 시간을 허비할 수밖에 없었단다. 이 고마운 친구들아, 너희의 그 여유와 하늘 한 번 쳐다보는 그 행복감을 나에게 메시지로 전해줘 고맙다”
몇 마리의 닭이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꺄우뚱거린다. ‘도대체 뭐라는 거야?’ 하는 반응이다. ‘그래, 어떻든 난 행복하다.’ 아주 가끔은 이런 소소한 행복과 함께하고 싶다. 이 각박한 세상에 하늘 한 번 쳐다볼 수 있는 여유도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인지? 의문부호이다.
이처럼 자주 ‘하늘 한 번 쳐다보는’ 소중한 순간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항상 겸손과 신중, 배려, 봉사하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내 욕심만 챙기기 위해 ‘쌈닭’이 된다면 저주받은 존재로 부각될 것이다. 그래서 소통이 필요하다. 일정 선에서 양보할 줄도 알고, 타인을 보듬을 수 있으며, 대승적인 차원에서 ‘나무보다는 숲을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져야 한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이런 혜안의 소유자가 많아지기를 희망해본다.
자, 하던 일을 멈추고, 주어진 처소에서 하늘 한 번 쳐다보자. 그리고 ‘배움과 성장’이라는 것이, 꼭 학교나 교육기관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마음가짐에 따라 ‘하늘 한 번 쳐다보면서’ 마인드가 새롭게 만들어지고 쭉쭉 발전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어린 시절 아무 것도 모르고 자주 바라보던, 그 하늘에 ‘쌈닭’도, ‘병아리도’, ‘知人도’, ‘각종 스트레스도’ 파란 물감으로 넘쳐나고 있음을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