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짓것’(까짇껃)의 사전적 의미는 첫째, 명사로 ‘별것 아닌 것’, 둘째, 감탄사 (같은 말) 까짓-‘별것 아니’라는 뜻으로, ‘무엇을 포기하거나 용기를 낼 때’ 하는 말-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 문제가 발생하거나 과정을 거쳤음에도 결론이 원하는 방향으로 도출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때,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말이 ‘까짓것’이다.
“까짓것, 그만두라고 해, 안되면 그만이지, 뭐 대단한 것이라고,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해보면 되는 거 아냐?”
“까짓것, 너만 하냐? 나두 한다. 어쩔래.”
이처럼 ‘별것 아닌’, ‘대단한 것도’ 아닌, ‘까짓것’을 시로 만날 수 있다. '어쩌다가 학급 글짓기 대표로 뽑혀서 내키지 않는 글쓰기를 일삼'는 시인 이정록의 (창비청소년시선 09, '까짓것' 창비, 2017.)이다.
개업 기념 반값 미용실에 갔다가
시궁에 빠진 미운 오리 꼴이 됐다.
단골집에 가서 다시 다듬었다.
더 이상하다. 빈털터리가 됐다.
까짓것 빡빡머리 스님도 산다.(까짓것 / 이정록)
얼마나 절약한다고, '개업 기념 반값', 그 중에서도 '반값'이라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미용실로 과감하게 발길을 옮긴다. 그리고 당당하게 앉아서 눈을 지그시 감고 멋진 머리를 상상한다. 그런데 이게 웬 반전, 머리 모양이 '시궁에 빠진 미운 오리'다. 개업 기념 반값을 되뇌이며, 단골집에서 다시 다듬었다.
그런데 더 이상하다. 자세히 보니, 빡빡머리다.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까짓것, 스님의 빡빡머리를 위안 삼는다. 그러나 어떤 것도 빈털터리 내 머리는 원상복구가 힘들다. 간절하게 시간이 흐르기를 기도해야 한다.
쪽지 글만 남기고 떠난 아버지 때문에
엄마가 운다. 여동생도 운다. 냉장고도 운다.
까짓것, 이라고 말하려다가 설거지하고
헛기침 날리며 피시방으로 알바간다.
까짓것, 돈은 내가 번다.
까짓것, 가장을 해보기로 한다.(까짓것 / 이정록)
아버지는 덩그러니 ‘유언’도 아닌 쪽지 한 장만 남기고 하늘나라로 먼저 가셨다. 때문에, 엄마와 여동생이, 그리고 우리 집 냉장고가 운다. 가장인 아버지의 죽음은 가족들에게는 이겨내기 힘든 상처이다. 엄마와 여동생의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나는 큰소리로 울 수도 없다.
그저 바라보면서 마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눈물을 찔금찔금 닦아내야만 한다. 그때, 말하려던 것이 바로 ‘까짓것’이다. 그래서 '까짓것', 이라고 말하려다가 설거지하고, 헛기침 한 번으로 마음을 추스리고 피시방으로 알바를 간다.
‘까짓것, 그 까짓것, 돈, 돈, 돈, 그 돈을 다 쓸어 담을거야’
‘그래 까짓것, 내가 아버지 대신 가장이다. 뭐, 그래, 가장, 내가하면 되지? 아버지는 처음부터 가장이었나? 그래. 이제부터 내가 가장하지 뭐? 문제없네, 까짓껏, 가장 뭐 별거겠나? 함 해보자. 뭐,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로 말야?’
‘까짓것’, 엄마와 여동생의 울음은 그래도 시간이 가면 멈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재’가 가져올 가장 큰 문제는 ‘먹고 사는’ 문제에 직면한다. 정신적, 경제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착한 가족들에게 다가온 냉장고가 비어 있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까짓것' 그래도 냉장고를 채워가며, 엄마와 여동생에게 '웃음'을 되찾아 주기 위해 '가장'이라는 무거운 '멍에'를 짊어진다.
위의 시처럼, 우리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주로 사용하는 말이 ‘까짓것’이다. 그렇지만 분위기 탓에 ‘까짓것’이란 말을 쉽게 내뱉을 수도 없다. 자칫, 철없고 가벼운 사람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어떤 일이든, ‘까짓것’, ‘별것 아닌 것’이라는 마음으로 ‘내려놓기’는 쉽지 않다.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결론을 도출하는 인류에게 ‘다양성’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답은 쉽게 나온다. 다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한결 마음이 편안한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까짓것, 머리카락 정도야, 대머리면 어때, 누가 나를 우습게 보는 거야?
까짓것, 내가 다 책임진다. 나만 믿어라.
까짓것, 사는 것이 뭐, 별거냐? 다 덤벼라. 내가 싹 쓸어버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