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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을 인정하자



박 여 범
- 용북중학교 국어교사
- 문학박사·문학평론가·수필가





어느 날, 우연히 40년의 시간이 지나 ‘카톡’을 통해 연락이 닿은 친구가 있다. 중학교 동창으로 공부를 잘하던 친구였다.


“내 친구 버미 같은데......”
 짧은 이 한 문장에 스팸이려니 지워버렸다. 이어서 ‘카톡’이 징징거린다.


“내 친구 버미......”
슬슬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착한 내가 참아야지’하면서 차분하게 내용을 읽어 보았다. 역시, 내용은 동일했다. 보낸 사람을 확인했다. ‘000’, 세 글자가 낯설지 않다. 대화를 시작했다. 문자를 통한 피싱이려니 했다.


“누구신지요? 저를 알고 계신가요? 혹시”
“나, 고등학교 때 미술 잘 그리던 친구 000인데, 모르겠니? 버미야”
‘미술이라고, 고등학교 시절......’ 추억을 더듬어 보니, 두 명의 친구로 좁혀졌다.


“혹시, 000”
“그래, 나 000”
“반갑다, 전화번호 찍어 줘”


통화를 시도했다. 목소리도 기억이 없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은 미술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자동차 영업을 하며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씁쓸했다. 다음을 기약했다. 아쉬움이 남았다. ‘왜? 그 친구는 미술로 성공하지 못했을까? 고등학교 시절 별명이 화가’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친구의 삶을 다양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화가’가 되어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부끄러웠다.



유명 작가의 글을 만나면, 편견은 기본이다. 이미 터득한 기본적인 지식이 편견을 가지고 책을 읽어 나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작가론 시간에 다루었던 ‘시인’, ‘소설가’, ‘수필가’, ‘평론가’에 대한 수많은 지식이 조각조각 뇌를 채워 버린 작가는 생생하게 다가온다. 무서운 것은 이러한 ‘행복한 지식(?)’이 작품 전반을 이해하고 삶에 적용하는 과정에 상당한 영향성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인간관계도 그렇다. 사람을 저마다의 재능이 있고 감성이 다르다. 어떤 일을 처리함에 있어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 대다수는 ‘해석’의 차이다. 이 ‘해석’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페북에서 언젠가 우연하게 만난 문장이 있다. ‘진정한 리더는 문제에 대한 방법을 생각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문제에 대한 변명으로 일관한다’라는 짧은 문장이다.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혹여, 지금까지 나는 모든 일에 변명하기에 바쁘지 않았었나? 아니면 어떻게든 엮이지 않고 마음이 편하기를 기도하지 않았던가? 갈등의 중심에 있는 것이 짜증 나지는 않았던가? 다양한 질문을 던져본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다양성’은 명사다. 모양 , 빛깔 , 형태 , 양식 따위가 여러 가지로 많은 특성을 보인다는 의미다. 이처럼 다양성은 어느 한 부분에 초점이 집중되는 것이 아니다. 책을 읽고 스토리텔링을 통한 나름의 만족 효과를 기대한다면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 ‘제목’, ‘목차’, ‘줄거리’, ‘서평’ 등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독서에 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토론하는 과정에서는 같은 문장이라도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무조건 자신의 해석이나 주장이 옳고 그름을 저울로 측정해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진다. 일상이 기쁘기도, 슬프기도, 그저 그렇기도 하다. 이처럼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에서 ‘내 것’만을 고집하다 보면, 자칫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



‘다양성’을 인정하자. 다양하게 바라보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다 옳다는 생각은 아니다. 방탄소년단, 엑소의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가 있으면, 아스트로(차은우, 문빈, MJ, 진진, 라키, 윤산하), 헤이즈, 아이유, 행주의 노래를 즐겨 듣는 아이들도 있다.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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