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경 로
<본지 논설위원/ 반태산작은도서관장>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연말 성탄절이 있는 12월에는 각 거리마다 캐럴송이 울리는등 서양 종교의 성자 예수를 상징하는 대중적인 거리의 풍습이 있었다. 지금도 약간의 캐럴송이 울리는 곳도 있지만 사실상 이러한 캐럴송이 거리에서 거의 사라졌다.
대신 거리 주변에 있는 각 교회나 성당에서의 화려한 색색의 불꽃연결색들이 자가 첨탑을 중심으로 길게 뻗어 가면서 눈으로나마 계절의 실감을 느끼게 한다. 거리의 캐럴송들이 저작권에 문제가 닥치자 거의 사라지면서 연말연시의 풍경이 많아 변화된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대체할 연말연시의 과거 풍습도 거의 사라졌다. 경제적인 것에 의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 어려운 생활에 이제는 절제하면서 새로운 한 해에 대한 기대로 과거의 특수가 사라진 것 같다.
성탄절의 각 교회나 성당 역시 예전과 같지 않다. 무엇보다도 신도들의 참여가 선행되어야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휴일로 각인이 되면 우리 사회가 휴가의 열풍에 빠지면서 외국 여행이 대세를 이루는 등 쉬는 날만 있으면 경제적 여유를 통해 외국 여행이 주류를 이루게 되어 성탄절의 화려함이 먼 옛날이야기로 비치고 만다.
과거 우리 사회에서 지나치게 종교적인 날로 각인이 되었던 연말연시에서 벗어나 일상의 정리와 결론을 맺어가는 연말이 되는 것 같아 바람직한 그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한, 정치권에서는 부처님오신날과 성탄절 등을 맞이하여 감옥에 있는 죄수들에게 특사를 통해 석방하거나 감형을 주기도 하는 등 종교적인 자비와 은혜를 베푼다는 속설이 있고 이것은 지금도 거의 관례화 되어 아마 이번 성탄절에도 특사가 나올지 지켜볼 일이다.
돌이켜보면 성탄의 의미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성스러운 탄생이다. 꼭 기독교 계통에만 성탄절이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기독교의 성자 탄생일을 성탄절이라고 해도 각인이 되어 불교에서의 생각도 역시 성탄이지만 우리말 나들이에서 워낙 뿌리 깊게 인식되다 보니 불교에서는 성탄절이 아닌 석탄절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우리말로 부처님 오신날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성탄절은 성스러운 날이다. 이날 만큼은 분쟁과 갈등이 아닌 화합과 평화 그리고 가족과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갈등은 성탄절을 무색하게 아직도 분쟁과 질투와 탐심과 오욕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다.
그것도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기독교라는 의미로 국회에 난입을 하는 등으로 우려와 염려를 낳게 하고 있어 과연 성자 예수가 2000년 전에 이 땅에 품어진 고귀한 언어의 말씀은 헛된 망상처럼 되어 버리지 않았나 염려가 된다.
사상과 이념의 한계에서 공동체 삶을 위한 성탄의 의미가 배려와 나눔을 통한 이해와 타협이 아닌 막무가내식의 폭력적인 언사와 행동이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갈 때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그들의 행태와 과연 무엇이 다를까 생각해 본다.
당연히 그들이란 기득권을 가진 그 땅의 율법주의자들이요 자칭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자들이며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이었다. 그들 속에서 작은 외침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알리고 구원의 실상을 알게 하여 가진 자들이 기득권을 내려놓고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게 하는 위대한 탄생의 시작이 열리는 날이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이스라엘과 한반도를 돌아보면 그렇게 다르지 않을 것을 느낄 수 있다.
2019년 성탄절이 곧 다가온다. 비록 이날이 성자가 태어난 날이 아닌 기념하는 날이라고 하지만 그 의미는 세계적으로 남다를 수 있다. 종교의 자유가 없는 북한이라고 해서 성자 예수와 성탄절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이제 성탄절을 앞두고 분쟁보다는 화합을 모색해보자. 화려한 캐럴송이 아닐지라도 마음속의 화려함으로 캐럴송을 불러보자. 그러면 상대방의 중심이 마음의 눈으로 보이고 다툼과 분냄보다는 이해와 나눔이 되어 세상이 밝아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