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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걸으라





김 은 영
<늘사랑교회 목사/ 소통과공감 심리상담사>
 

신이 인간을 창조하면서 이후 인간이 인간을 창조하는 잉태의 선물을 주었다. 혹자는 성서에서 선악과의 죄악으로 인한 고통의 나래를 잉태라는 동물적 본능으로 고통을 주었다고들 한다.


하지만 잉태의 과정은 정상적일 경우 고귀하고 순결하면서 생명이라는 순수함을 안겨주었다.
간혹 범죄적인 성폭행 등으로 잉태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런데 유전적인 영향이든 아니면 후천적인 영향이든 태어났든 생명이 간혹 장애를 겪는 경우가 있다. 장애의 유형이 참 많이 있지만 걷지 못하는 장애만큼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물론 눈이 보이지 않는다든지 혹은 신체 내부에서 좋지 않은 장애가 생긴 것들 여러 유형의 장애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걷지 못하는 장애만큼 불편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성서에는 이렇게 걷지 못하던 장애인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진 현장이 있다. ‘ 일어나 걸으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 하는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앉은뱅이로 살아온 이에게 걷는다는 소망은 엄청난 사건일 수 있다.


또한 맹인이 눈을 떴다는 사실로도 엄청난 사건일 수 있다. 우리의 전통극인 심청전에서도 심학규가 자신의 딸을 왕비로 만나 눈을 뜬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처럼 장애를 가진 분들의 기적적인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 좀 더 색다른 이야기들을 펼쳐준다.


그런데 좀 상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장애가 있는 사회현상의 각종 일에 대하여 기적적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는 명제를 주고 싶은데 어쩐 일인지 일어서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자신의 자리에 눌러앉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새로운 시대를 보는 눈이 아직도 막혀 있고 삼천리 방방곡곡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도록 일어나 걸을 수 있도록 하고 싶은데 정작 당사자들은 걷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다.


자신이 당한 현실의 불편을 당장 현실감 있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 걷게 해준다는 치유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눌러앉아 있는 것 같다.


당장 국회를 보면 무엇인가 개혁적이면서도 민주사회의 기본질서를 갖고자 하지만 일부 정치인들은 당리당략적 차원이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 당장 일어나 걸으라고 하는 국민 여론을 애써 무시한다.


일어나 걸어보면 앉은뱅이 시절의 불편함이 마치 신기루처럼 느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당리당략이나 개인에게 약간의 불이익이 미칠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신들에게 미칠 좋은 일들이 펼쳐질 것을 아는지 참 모를 일이다.


일어나 걸을 때의 처음은 매우 신중할 것이다. 그리고 적응하기가 사실상 조금은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장애인이 되었을 경우 일어나 걸어본 일이 없기에 그렇다. 하지만 처음은 조금 힘들지라도 재활과 훈련을 통해 차츰 정상인으로서 앉은뱅이가 아닌 당당한 사회인으로 스스로 일어나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여론이 이처럼 일어나 걷기를 원하는 수많은 개혁적인 사회변혁의 현상들이 있다. 하지만 일부 기득권들의 강력한 저항과 일어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로 인해 밝은 세상의 빛을 보거나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걷기를 포기하는 것처럼 비치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일어나 걸어야 한다. 기적 같은 일이지만 성서에서는 일상화되었던 신의 혜택이요 선물이었다. 또한, 걸을 수 있다는 당사자의 소망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걷게 되었을 때 신에게 감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태어나면서부터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할 수 있다는 기쁨은 정녕 새로운 인생의 황금기를 품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 역시 2020년의 새해를 맞이하여 다시 한번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중심을 갖고 일어서기를 원한다. 일어나 걸을 때 우리는 동질성이 회복되고 슬픔보다는 기쁨을, 탄식보다는 웃음을 그리고 미움과 분노보다는 사랑과 은혜로 일어나 걸어보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될 것이다.
 

한 해가 가면서 새해의 기대가 있는 세밑에 기쁨과 웃을 수 있는 가슴이 확 뚫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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