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여름 나기나 겨울 나기라고는 말하지만 봄 나기, 가을 나기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이를 보면 여름이나 겨울을 지내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는 인식이 존재하는 것 같다. 봄이나 가을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에게 여름은 반가운 존재가 아니나 겨울은 봄 가을 못지 않게 즐거운 계절이다. 사계절 중 3/4를 즐기는 셈이니 세월의 낭비가 그 만큼 덜 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기상청 장기 예보에 이번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다고 한다. 지금도 창 밖으로 보이는 아파트들 지붕 위에 눈이 남아 있는 것을 보니 금년 겨울은 오랜만에 눈을 쉽게 가까이 한 계절인 것 같다. 겨울내 길 거리에 눈이 쌓여있는 폴란드와 노르웨이에 살 때는 겨울은 어려움을 나는 시기라기 보다는 추위와 눈을 즐기는 계절이라는 생각이었다. 한국에서도 눈 쌓인 산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니 춥고 눈만 온다면 겨울이 반갑다.
한국은 몬슨 기후 탓도 있겠지만 연중 강수량의 태반이 여름에 집중되며 겨울의 강수량은 미소해서 눈이 온다 해도 몇 센티미터에 그친다. 작년 1월 하순 일본 니이가타현 시가고겐에 가니 하룻밤에 80센티의 눈이 내려 스키어들을 즐겁게 하였다. 일본은 세계 최고로 강설량이 많은 국가로서 연간 10미터의 강설량을 기록하는 지역도 있다고도 하니 눈 복까지도 많은 나라이다. 과거 역사에서 많은 나라들을 침략하고 노략질한 것으로 악명높았던 바이킹의 후예 스칸디나비아(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국가들이나 한반도와 중국 해안을 수백년간 약탈하며 괴롭혔던 왜구의 후예 일본이 인근의 어떤 나라들보다 더 복을 받고 잘 사는 것을 보면 세상에 정의를 세우는 신 같은 존재는 분명히 존재하지 않음이 확실한 것 같다.
이번 시즌에도 연말연시 매주 2-3일씩 용평에서 지내며 눈 오기를 기대하나 최대 몇 센티에 그치니 전적으로 인공눈으로 만들어진 딱딱한 슬로프에서 놀고 있다.
몇 년전에는 동서울 버스터미널에서 횡계행 시외버스를 이용하였는데, 근래에는 청량리역에서 동해선 KTX를 타고 진부에서 내려 버스편으로 횡계(용평)에 가는 루트를 발견하니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 같다. 얼마 전 KTX편 용평으로 가는 길에 08:46 진부역에 내려 상원사행 버스에 올랐다. 월정사를 거쳐 40분을 가니 상원사였다. 눈 덮인 오대산 비로봉(1,565m)에 오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6년 전의 무릎 디스크 절제 후 등산은 삼가지만 눈이 쿠션이 되는 겨울산은 오를만 하다. 월정사에서 9km를 더 가 상원사 아래에서 내리니 많지는 않으나 눈이 보였다. 오대산의 정상인 비로봉까지는 3.5km라고 적혀 있었다. 해발 900m 정도에서 걷기 시작하는 것이니 일단 정상까지 두시간 정도를 예상하였다. 상원사를 우측에 두고 20여분 오르니 중대사자암이었다. 상왕봉을 거쳐 8km 코스로 내려갈 수 있었으나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는 깊은 산의 혼자 겨울산행이라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여유롭게 다시 3.5km 코스를 택해 하산하였다.
하산 길에 권영민 대사(주독일, 주노르웨이대사 역임)의 소천소식을 접하고, 눈과 산과 푸른 하늘을 둘러보며 그가 그 어느 곳에서 그 특유의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고 있을가 상상해 보았다. 10년전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철쭉 세상을 보며 한라산을 오르다가 미국의 아까운 지인이 별세한 소식을 접하였었는데 이 오대산에서는 권대사의 소식을 접하니 그들의 영혼은 산을 좋아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산을 좋아하니 누군가가 등산 중 어느 때에 나의 부음을 듣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추운 날씨 탓에 상원사발 4시버스로 진부로 가서 5시발 강릉행 시외버스를 타고 횡계에 내리니 5시20분이었다.
인근 호텔방에 무거운 배낭을 푸니 제법 힘들었지만 즐거운 겨울 하루였다는 생각에 만족하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용평리조트로 가서 9시부터 슬로프에 올랐다. 전날 오른 오대산이 어느 산인지 정확하게 특정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산의 파노라마가 수십킬로 멀리 펼쳐져 보였다.
권 대사가 항상 입에 담고 살았던 carpe diem은 세상을 즐겁게 살자는 의미였을 것이다. 의무적인 노동에서 벗어난 백수로서는 남겨진 시간을 carpe diem하는 일은 손 쉬운 일 같다. 권 대사님, 하늘나라에서 맘껏 carpe diem 하십시오. 우리가 다시 만날 날도 멀지 않았으니 먼저 간 그곳에서 우리 모두 만나는 날을 즐겁게 보낼 술집도 잘 봐 두시길 바랍니다. 어쨌거나 carpe diem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