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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첫 岐路

어려운 시절 교수들의 처신은 어려웠다. 자칫하면 '해직교수'가 되거나 최종길 교수처럼 '의문사 교수'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상아탑의 본분'만 들먹이며 못본 체 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선지 4.19 당시의 교수데모도 내막은 어수선했다. 많은 교수들은 반대하다가 일부 열성파 교수들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며 플랭카드를 치켜들자 뒤를 따랐다.


교수들의 그런 고민은 6.25 전후에도 볼 수 있었다. '좌냐 우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고뇌는 고민으로 끝나지 않았고 운명을 갈랐다. 그러나 지식인들이 선택을 강요받은 상황은 그전에도 있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오늘 서울대 9개 단과대의 동맹 휴학으로 번진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파동이 그것이다.


미군정청이 일제가 설립한 경성제대를 모태로 다른 전문대들을 흡수해 미국식의 종합대학을 설립하려던 이 계획은 광복후 처음 일어난 반미 색채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지식인들이 처음으로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이기도 했다. 직접 당사자인 서울대 교수들은 말할 것 없고 다른 대학 교수들도 나름의 찬반의사를 비쳐야 했다. 미군정청이 그해 6월 국대안을 발표하자 반대운동이 해당대학은 물론 타대학이나 중학(요즘의 고교)으로 번진 것이다.


이듬해 2월 절정에 달하던 이 투쟁은 5월 12일 서울대가 전교생의 절반인 4956명을 제적하고 교수 380명 (전체의 3분의2)을 해임함으로써 끝난다. 그 학생 가운데 3500명은 복교하지만 많은 교수들은 돌아오지 못하다가 6.25를 맞자 돌아 올 수 없는 길을 걷는다.


그런 시련을 딛고 생겨난 서울대는 그 뒤 너무 발전해 '서울대 폐지론'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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