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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행려병자의 죽음

1948년 오늘 정월 나혜석이 원효로 시립 자제원에서 눈을 감는다. 이름은 그럴 듯하지만 '자제원'은 행려병자들을 '처리'하는 국립의료기관이었고 나혜석도 행려병자의 하나였다. 자제원에 그의 사망사실만 기록돼 있을 뿐 그가 언제 들어 왔으며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 기록되지 않는 것도 그런 것이다. 그 쓸슬한 최후는 나혜석의 일생을 축도한 것이기도 하다.


그가 개인적으로 이룬 업적을 떠나서도 수원의 '큰대문 참판댁' 딸로 태어나 변호사이자 외교관을 전 남편으로 둔 여인에게는 너무 걸맞지 않은 임종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패배자라기보다는 신념을 지키려는 인간이 스스로 택한 고난이기에 이날은 갈수록 외롭지 않은 기념일이 되고 있다. 그는 시대를 앞질러 보는 안목에다 이를 실천하려는 용기까지 갖추었기에 완고한 1920~30년대의 사회와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나혜석이 파탄으로 끝난 결혼을 하기 3년전인 17년 학지광에 쓴 글에서도 드러난다.


"움직이는 자여 실패 있음을 각오하라 하였소. 활동하는 자에게는 실패와 성공의 결과가 있을 것이며 그 속에는 승리와 희생이 있을 것이오. 아아! 나가다가 벼락을 맞아 죽든지 미끄러져 망신을 당하든지 나가볼 욕심이오."
그는 이혼한 남편 김용우와 여권문제에서만 이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비록 말년의 일이지만 김용우는 조선 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친일의 길을 달리며 성공을 거둔다. 반면 나혜석은 박태원의 소설 '약산과 의열단'에서도 독립투사인 약산 김원봉을 돕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 나혜석에게 무덤이 없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념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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