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그 둘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한평생 전국을 떠돌아다녔다는 시인과 19세기 초부터 연해주로 들어간 조선인들인 카레이스키 사이에는 마땅한 주파수도 없다.
혹시 술 한 잔에 시 한 수라는 김삿갓의 수법이 조선에서 잘 먹혀들지 않자 연해주라도 갔단 말인가. 설마... 얼핏 까마득해 보이는 김삿갓과 카레이스키지만 1811년 오늘 일어난 홍경래란으로 돌아가 보면 양쪽이 모두 지척이다.
김삿갓은 당시 선청방어사였던 김익순의 손자인 김병연(1807~63)으로 태어났으나 홍경래란을 거침으로써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거듭난다.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항복해 자신은 처형되고 집은 멸문의 화를 입어 손자 병연이 방랑에 나선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카레이스키도 홍경래란의 피해자다. 서북인에 대한 차별 때문에 일어난 이 난은 차별을 없애기는커녕 무차별 학살을 몰고 왔던 것이다. 많은 서북인들은 관군의 무자비한 보복을 피해 간도를 거쳐 연해주로 옮아 간다. 기록상으로는 카레이스키는 1863년 13가구가 이주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러시아가 연해주에 관심을 가진 것은 1858년의 아이훈조약 이후이고, 그때까지 연해주는 러시아도 청나라도 별로 관심 없던 따잉었다. 그 땅에 흘러 들어간 카레이스키들도 정착을 못한 채 떠돌아다니는 것은 김삿갓과 비슷했다.
일본과 소련의 대결 구도에서 일본편으로 몰려 중앙아시아로 끌려갔으니 '집단 강제방랑'인 셈이다. 그러면서도 카레이스키들의 피어린 발자취가 시베리아에서 사라지지 않은 것은 민족 방랑의 서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