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극우 전체주의 퇴치는 더 강한 민주주의로(2)

김종대 / 연세대 통일교육원 객원교수

야 6당이 탄핵 국면에서 원탁회의를 개최하는 모양이지만 민생이나 사회개혁의 의제를 채택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런 협의체를 무엇 때문에 만든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극우로 경도되는 시민들에게 야당은 자신들의 정권 장악에만 관심이 많은 것처럼 여겨진다. 민주주의가 외로운 사람, 불안한 사람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절박한 사람들은 민주적 질서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된다. 여기에 사회 갈등을 촉진하는 종족 사업가(ethnic entrepreneur)들이 등장하여 우리가 겪는 고통의 원인을 중국이나 북한, 야당 때문이라고 속삭인다. 여기에 우리 사회의 평범한 사람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민주주의가 무력화되는 만큼 전체주의는 힘을 얻는다. 극우 세력은 민주주의의 허약한 지점을 공략하면서 성장한다. 극우의 광장에서 힘을 부여하는 사고의 특징을 살펴보자. 먼저 기독교식 재림사상이다. 너절하고 번거로운 민주주의는 혼란과 폭력을 막을 수 없으므로 우파 기독교 사상이 그 공백을 대신한다. 종교적 태도는 적과 동지로 사람을 나눈다. 이제 목사님은 적인지 동지인지를 구분하기 위해 “너는 누구냐”고 묻는 대심문관이 된다. 시민이 직접 심문관이 되어 동료 시민을 감시하는 검문과 색출이 실행된다. 극렬 시위대가 공공기관 직원에게 “시진핑 XXX라고 외쳐봐”라며 검열한다.

그 다음으로 위생 감각이다.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은 우리의 순수한 공동체에 침투한 일종의 기생 바이러스다. 이런 이방인들은 일자리를 빼앗고 전염병을 퍼뜨릴지도 모른다. 극우 광장에서 아동과 여성, 청년들이 주로 이런 주장을 한다. 더러움에 대한 혐오는 동성애자, 이슬람인들에게도 적대감을 표출한다. 그 다음으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자위권 의식이다. 외부 주권 침탈 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무력하기 때문에 제도 바깥에서 왕국을 따로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이다. 자유 마을이라는 공동체 구상이나 기독교 대안학교를 통한 출산 장려로 자신들만의 자급자족형 삶을 지향한다. 이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극우 세력은 군인이나 경찰 출신들을 집회에 초청하며. 더 나아가 스스로 자유 통일의 전사를 자임한다.

다음으로 결단과 행동을 촉구하는 의무와 소명이다. 비상계엄은 대통령의 정당한 결단이며 서부지법 난입사태는 폭동이 아니라 혁명이다. 좌파 사법 카르텔을 처단하고 제도를 전복시키는 결단력과 대범함이 그 자체로 선이다. 이재명 대표를 칼로 찌른 자, 과천 정부종합청사에서 부탄가스를 몸에 두르고 분신한 자는 영웅이다. 국민의힘 김민전 의원은 분신 사망자가 사망한 과천 청사 인근의 빈소를 며칠 동안 지키며 백골단식 행동을 촉구한다. 한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윤석열은 순교자의 길을 가고 있다. 그 다음으로 능력주의다. 장애인과 여성, 외국인에 대한 보호는 부당하다. 세상은 정글이기 때문에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고 힘이 곧 정의다. 일부 청년들은 지방과 외국인과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해 오찬호의 책 제목처럼 “차별에 찬성합니다”라고 외친다. 이런 사고의 특징들은 이상하게도 민주주의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무언가 착착 감기는 느낌을 준다. 그동안 민주적 자유주의자들이 ‘닥치고 공존’을 외치며 사실상 부당한 억압을 자신들에게 행사했다면 극우 세력은 ‘닥치고 전쟁’ ‘닥치고 혁명’을 외치며 세계관의 전복을 시도한다. 다만 공권력에 비해 아직 힘이 모자라 게릴라식 도발을 벌이지만 언젠가 힘이 결집되면 큰 판의 폭동을 도모할 수 있다.

극우의 비논리성과 충동적 행태가 위협적이라 할지라도 민주주의는 절대 지지 않는다. 극우 세력으로 인해 사회가 치러야 할 희생과 비용을 얼마만큼 줄일 수 있느냐의 문제다. 사실 극우 세력 그 자체가 원인이라기보다 한국의 양극화된 정치 시스템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 파벌주의 양당 체제와 승자 독식은 오징어 게임과 다를 바 없다. 신념보다 파벌의 이익에 충성하는 정치인들은 공동체의 선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이 속에서 기득권 엘리트주의는 전체주의를 촉진하는 불쏘시개였다. 한국 민주주의는 성숙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어정쩡한 민주주의, 즉 바버라 F 월터가 『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에서 제시하는 위험한 구간인 아노크라시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다. 차기 정부는 강성 파벌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설계하는 인재들이 운영해야 한다.

사실 한국만의 문제만도 아니다. 이미 세계는 ‘전 지구적 내전’에 진입한 지 오래다. 지금의 민주주의는 파국을 막을 가드레일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극우의 광장을 해산시키고 내전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더 강력하고 견고하며 포용적인 민주주의를 설계해야 한다. 양극의 중간 지대를 확대하고 선거인 표의 비례성을 높여야 한다. 이를 통해 다양성이 존중되는 더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이 답이다. 한국의 진보 세력은 연합을 할 때 강했고, 협치와 연정을 약속하며 박근혜를 탄핵한 바 있다. 그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을 다가올 대선에서 제대로 구현하는 것이 아노크라시로부터 탈출하는 출구 전략이 될 것이다.<끝>


*  *  *
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외부원고 및 기고는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