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1년이 조금 지난 2023년 9월, 에는 ‘고등학생이 손꼽은 윤석열 대통령의 ‘업적’ 네 가지’라는 기사가 실렸다. 대통령 윤석열에겐 잘못한 게 전부이지만, 그래도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업적이 있을 것이니 그걸 한번 찾아보자는 반어법의 기사였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우선, 자타공인 우리나라 최고의 학부인 서울대 법대의 수준이 '저 모양'이란 걸 몸소 보여준 거라며, 서열화한 학벌 의식을 약화시키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니 서울법대 나온 윤석열 대통령의 공이고, '공익의 대표자'라는 검사들이 얄팍한 법 지식을 활용해 사회적 약자와 정적을 괴롭히는 자들이라는 ‘법꾸라지의 민낯’을 보게 되었으니 그 또한 윤석열 대통령의 공이며, 무엇보다 민주주의가 일순간 무너질 수도 있는 허약한 제도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것이 윤석열 대통령의 최대 치적이라고 했단다.
지금 나라가 ‘요 모양 요 꼴’인 건, 기성세대가 서울대 법대를 나오고 검찰총장에까지 오른 최고 엘리트라면 더 따져볼 게 없다는 생각으로 윤석열에게 표를 몰아준 결과라는 것이 그 고등학생들의 진단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통찰에선 고등학생들의 예리한 통찰에 박장대소하였으나 민주주의의 취약함과 어른들의 ‘묻지마 투표’를 간파한 세 번째와 네 번째에선 몹시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름 바꾸고 얼굴 바꾼 김건희는 ‘타인의 삶’을 살기만 한 건 아니었다. V0 김건희는 V1 윤석열을 조종하여 법 위에 군림하며 특권과 특혜를 누리는 ‘기득권층 타인’들의 행태를 가감 없이 투명하고 정직하게 드러내어 일반 대중에게 보여주기도 하였는데, 이를테면 이런 거다.
윤석열은 사실상 여론 조작을 통해 국힘당의 대선 후보가 되었고 기득권 정당에선 여전히 공천을 사고판다는 걸 보여주었다. 정치와 종교가 헌법으로 분리된 나라인데, 윤석열이 당선된 그 대선에선 무속신앙만이 아니라 통일교와 신천지와 대형교회가 선거에 개입했다는 걸 보여주었다. 국가조찬기도회라는 근사한 간판 뒤에선 뇌물을 주고 인사 청탁을 하고 이권에도 개입하고 관직을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있었다는 걸 보여주었다.
수천만 원짜리 다이아 목걸이, 금거북이만 뇌물인가. 자리만 주면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충성 맹세가 있었다면 그 또한 무형의 뇌물이 아니겠는가. 부정부패를 예방하고 공직사회의 청렴을 지키는 것이 설립의 목적인 국민권익위원회가 김건희의 디올백에 면죄부를 발부한 행위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위원장이 임명권자인 윤석열과 서울법대 동기이고 절친이라서 그랬을까?
소수자, 약자에 대한 차별을 막아야 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인 인권위원회에 차별주의자를 임명한 이유를 또한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방송의 독립을 지키는 것이 첫 번째 임무인 방통위원장에 극우성향의 인물을 임명한 이유를, 독립을 기념해야 할 독립기념관장에 친일 성향의 뉴라이트 인물을 임명한 이유를, 충성 맹세라는 무형의 뇌물이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열거하다 보면 숨이 찰 정도인데, 새벽까지 술에 찌들어 있었다는 대통령 윤석열에게선 그 모든 걸 챙겼을 부지런함을 찾아볼 수 없으니 자기의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흉내 내던 ‘V0 김건희’를 빼고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 죄가 태산 같아서 몇 삽을 퍼서 V1에게 떠넘긴다 하여 한강에서 물 한 컵을 뜬 것만큼이나 줄어든 티가 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김건희에게 과(過)만 있는 건 아니다. 따지고 보면 공(功)도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거다.
윤석열 치하의 검찰은 ‘친윤’ 아닌 사람들에겐 무시무시한 저승사자였으나 김건희에겐 꼬리를 살살 흔드는 애완견이었는지라 양심이 있는 검사라면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한다고 해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되었으니 그건 순전히 김건희의 공(功)이다. 탐관오리들이 득세하던 가렴주구의 시대에나 있었던 매관매직이 기득권 계층에선 아직도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었느니 그 또한 김건희의 공(功)이다.
공부 잘하고 많이 배워 높은 자리에 오른 자들의 부도덕하고 몰양심에 몰염치한 얼굴을 보게 되었고, 뭐니 뭐니 해도 고등학생들도 간파한 것처럼 민주주의가 취약하다는 걸 알게 해주었으니 그보다 더 큰 공(功)이 있겠는가.
타인의 삶을 감시하다 정의로운 삶에 감화된 영화 속의 비밀경찰은 지위를 잃었지만 인간의 얼굴을 되찾았다. 이름 바꾸고 얼굴 바꾸고 경력을 세탁하여 타인의 삶을 살았던 김건희는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어도 여전히 타인의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죽으면 남편이 살길이 열릴까’ 하며 열녀가 되더니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며 직녀가 되었다가 ‘가장 어두운 밤에 달빛이 밝게 빛나듯이…’ 하며 철 지난 유행가 읊어대는 삼류시인이 되기도 한다.
철창에 갇힌 김건희가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 둘 일은 아니다만, 고등학생들도 간파했던 것처럼 어른들이 투표를 잘못해서 나라가 ‘요 모양 요 꼴’이었다는 걸 그 어른들이 깨닫고 각성하게 된다면, 그 또한 ‘타인의 삶’을 흉내 내던 김건희 덕분이니 나중에 판사가 판결문을 쓰면서 김건희의 형량을 감해주는 작량감경의 사유로 삼더라도 나는 그 판사를 탓하지 않을 것이다.
본 칼럼은 시민언론 민들레에 기 게재된 내용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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